개혁개방 하면 학생들은 공부만 해도 되는데…

▲ 물모를 뜨고 있는 북한주민들<사진: 연합>

지금 북한은 ‘모내기 전투’ 중이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모내기 전투는 대미 주공(主攻)전선’이라며 주민들에게 반미정신과 모내기 사업을 연결시켜 ‘전투를 벌이자’고 연일 부추긴다.

그야말로 ‘부지깽이도 바빠서 뛴다’는 5월 말이다. 보나마나 북한인민들은 지금 농사일에 총동원 되었을 것이다.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주민들은 논으로 밭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지금 북한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어뗳게 보내고 있을까.

“밥숟가락 드는 사람이면 다 나오라”

서울 양천구에 살고 있는 김명화(가명, 43세)씨는 북한에서 유행하는 ‘밥 숟가락 드는 사람은 다 나오라’는 말을 인용하며 “지금 온 나라가 당의 지시로 모든 가동을 멈추고 농촌에 총집중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쯤 방송차는 거리를 돌며 ‘농사는 곧 미국 놈과 싸워서 이기는 길’, ‘인민들이 먹는 문제를 언제나 심려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선전한다. 각 기관의 당비서들은 노동자, 가정부인, 중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밥숟가락 드는 사람은 모두 농장에 나가라고 조직한다.”

어머니인 김씨를 따라 입국한 철진(가명, 15세)이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5월을 맞는다. 그는 자기가 북한에 있었으면 지금쯤은 농촌에 나가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철진이도 농촌전투에 나갔다 몇 번 도망쳐 나오곤 했다. 12살 짜리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하랴만, 그래도 무조건 동원시킨다. 어른들이 고생하는 것은 괜찮은데 아이들이 힘들어 하는 걸 보면 가슴이 쓰렸다.”

김일성이 “아이들을 고이 키우면 ‘글뒤주'(글밖에 모르는 선비)가 된다. 쓸모 있는 학생으로 키우려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해야 한다”고 지시하면서부터 학생들이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기만 하면 봄철에 두 달, 가을에 한 달을 농촌동원 시킨다. 여기에 맛을 들인 농장원들이 농사철이 되면 지원노력이 나오겠거니 하고 오히려 일을 안 했다.”

학생들, 밤 9시까지 모내기 전투도

이제 열 다섯 살이 된 철진이는 몇 해전 모내기 전투를 떠올렸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뜨기 전투였다. 작업반장은 우리에게 ‘모를 꽂는 어른들이 1211고지(6.25 전쟁시기 동부전선에서 전투가 격렬했던 고지)라면, 너희는 고지에 탄약을 공급하는 공급수’라고 말하곤 했다.”

아침 5시가 되면 선생님이 학생들을 기상시킨다. 채 깨지 않은 눈을 비비고 아침밥이 될 때까지 논밭에 나가 모를 떠야 한다.

하루에 한 아이가 벼모 두 판을 떠야 되는데, 한 판의 길이가 9m이고, 너비는 1.6m 이다. 하루 두 판을 다 뜨자면 12시간 일해도 다 못한다. 보통 새벽 5시부터 저녁 7까지 일하고 계획을 못하면 저녁밥 먹고 밤 9시까지 야간작업을 한다.

경쟁이 붙으면 손동작이 빠른 아이들은 오후 5시쯤에 두 판을 다 뜨지만, 나는 엉덩이가 다 젖어 올라올 때까지 해도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처음 하루 뽑아보니 손가락 관절이 쏘고 시뻘겋게 붓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손가락의 지문이 다 지워지고 없어졌다.”

개혁개방 하면 학생 동원할 필요 없어

농촌에서 일이 바쁘면 학생들이라고 일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려운 시기는 모두 힘을 합쳐 농사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학생들이 교실을 떠나 농사일에 동원되어야 하는가.

북한의 식량난은 개혁개방만 하면 2년 안에 해결될 수 있다. 베트남은 ‘도이모이'(베트남식 개혁개방) 직후 식량수출국까지 되었다. 북한당국을 탓하는 것은 학생들을 농사일에 동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개혁개방 하면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데, 왜 농촌개혁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로지 김정일의 정권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농촌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인민들과 학생들 뿐이다.

90년대 식량난 이후 북한의 나이 어린 한 세대가 거의 단절되었다. 살아남은 학생들도 미래가 없다. 젊은 세대에게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면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학생들을 이렇게 방치해둘 것인가. 언제까지 김정일 정권은 젊은 세대들의 미래까지 인질로 삼아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북한의 모내기철을 돌아보면 가슴이 아려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