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기업 물품 도난 北 당국이 원죄(上)

개성공단 입주업체 가운데 처음 철수를 결심한 스킨넷 김용구 사장(41)은 9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스킨넷은 모피제조업체로 2007년 9월 개성공단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해 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8월부터 개성공단에 통행제한이 걸릴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부 바이어가 주문을 끊었다. 지난해 12월 통행제한에 이어 올해 3월 통행차단 조치가 이어지면서 매출액이 지난해의 3분의 1로 확 줄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개성공단에 장기간 근무한 관리직 사원은 10일 데일리엔케이와의 전화 통화에서 현재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의 임금문제, 도난사고, 노동자들의 생산의욕이 낮은 현상 등 여러 어려운 점들을 토로했다.

개성공단 월평균 임금은 74달러로 베트남 1∼2년차 근로자 인건비(평균 80달러)와 비슷한 수준이다. 북측의 요구대로 최소 2배 이상 올린다면 베트남보다 더 비싸진다. 그러나 생산성은 한국이 100이라면 개성은 여전히 35에 불과하다.

북한에서 국내로 온 탈북자들은 이 관리자의 고충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이다. 세계 어느 기업이나 공단에서의 크고 작은 도난 사고를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북한처럼 근로자와 상급 관리자가 결탁해서 조직적으로 물건을 빼내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는 엄연히 범죄행위에 해당하고 북한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행위를 인식하기 어려운 특수한 환경이 북한에는 존재한다. 개성공단 입주 업체의 생산품 및 원자재에 따라 도난의 정도는 차이가 있지만 한 업체는 도난 물품의 비율이 12%나 차지하여 업체의 생산성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이러한 일이 상시적으로 발생한다면 혹자는 북한 출신 사람들을 도둑 취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북한 사람들의 인성이나 자질과는 별 상관이 없다. 무슨 노래가사처럼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식량난에 접어들기 전에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인심은 이곳 사람 못지않게 남을 생각했다고 본다.

북한 당국이 인민들의 생활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허울 좋은 구호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노동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만큼의 배급은 정기적으로 해줘야 한다. 개성공단 근로자 한 달 월급은 북 당국이 일괄적으로 받아서 이 중 절반만 근로자에게 지급한다.

근로자에게 돌아오는 많아야 40달러이다. 이 액수는 시장 환율로는 북한돈 14만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북한은 시장환율이 아닌 공식환율을 적용해 1달러를 약 140원으로 맞춰서 지급하기 때문에 5600원이 된다. 이 돈으로는 시장에 나가도 쌀 2kg을 겨우 살 정도의 월급이다.

식구 넷이 한 달에 백미로만 계산하면 적어도 30㎏정도 있어야 하는데 현재 백미 1㎏당 평균 2100~2400원 정도니 한달 먹을 식량 값으로만 60000~72000원이 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성공단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도 그 대가는 북 당국이 대부분 갈취하기 때문에 노동 의욕과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게 된다.

북한에서 한 때 유행했던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해먹고 안전부는 안전하게 해먹고 간부는 간 크게 먹는다”는 말까지 있다. 일명 “간부는 큰 도적, 노동자는 작은 도적”이라고도 한다.

굶어죽을 판인데 체면 염치가 어디 있고 자기 살 궁리를 하는데서는 간부고 노동자고 체면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간부는 내놓고 해먹지만 권한이 없는 노동자는 몰래 할뿐이다.

평북도 신의주 신발공장의 실례를 보기로 하자.

1990년대 중엽까지 이 공장은 정상적인 생산 단위였다. 여기서는 주민들을 위한 편리화, 운동화, 비닐신 등 여러 가지 민간인 신발들을 생산, 공급해 왔다. 정상 가동되던 시기 이 공장 노동자들은 크게 잘 먹고 잘 살지는 못했지만, 북한의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만족해하며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국가 사정으로 전기, 자재 등 모든 것이 부족해지자 생산을 멈추게 되었다. 본래 이 공장은 종업원 4천명과 두 개의 부속 공장을 가진 경공업 산하 2급 기업소로 ‘신의주신발’이라고 하면 전국은 물론 평양에서도 알아주는 질 좋은 신발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발을 잘 만드는 공장이라 해도 유일관리제로 유지되는 북한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

당시 살아남아 가동되는 공장들은 제2경제 산하 군수품공장들뿐이었다. 생산이 중단되어 전전긍긍하던 신의주 방직공장에서 먼저 2경제위원회와 합의하여 생산 지표를 받고 군수 생산에 들어가자 신의주 신발공장에서도 발 빠른 작전을 펼쳐 1990년대 말부터 군수용 신발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군수품을 생산하게 되면 일단 국가로부터 식량 배급이 나오고 적은 봉급이라도 받게 되며 또 공장도 어느 정도 살 궁리를 할 수 있게 된다. 한 달에 평균 7~10일, 길어서 보름씩은 생산이 진행되는데 그 기간은 온 공장이 ‘전투’다.

노동자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생산기간 동안 노동자들이 벌이는 ‘전투’는 간부들이 떠드는 ‘계획’과 ‘제품의 질’이 아니라 바로 그 네들이 먹고 살기 위한 ‘도적 전투’다.

생산이 진행되는 동안에 하나라도 많이 채서 챙겨야 다음번 생산이 진행되기 전까지 먹고 살 마련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노동자들이 말하는 ‘전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