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던 로버트 박 입북에 쇠망치 맞은 듯 충격”







▲나우 대표 지성호(30) 씨가 ‘남북청년이 함께하는 통일학교’에서 북한의 시장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최선혜 기자

지난 19일 오후 동국대의 한 강의실에서 북한 장마당의 최근 모습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다. 앞 자리에 앉은 젊은 남성이 영상을 가르키며 “최근에 북한에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한국 제품을 사려고 한다. 작년에는 한국산 전기포트의 광고 모델이었던 남한 배우 전원주 씨의 인기가 높았었다”고 설명했다.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영상을 보던 사람들은 전원주 씨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는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장마당이 활성화 됨에 따라 주민들의 의식도 변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오갔다.


강의실에 모인 이들은 ‘북한인권을 위한 남·북·해외교포 청년 단체 나우(NAUH)’의 회원들이다. 지난해 4월 결성된 나우는 ‘Now, Action, Unity for Human rights’의 약자로 한국 대학생, 직장인, 탈북 대학생, 외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남북한 청년들의 북한인권실태 이해와 통일준비 교육을 목적으로 ‘남북청년이 함께하는 통일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6주차였던 이날 교육에서는 최근 북한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주제로 강의가 이뤄졌다. 


나우의 대표를 맡고 있는 지성호(30)씨를 교육이 끝난 직후 강의실에서 만났다. 현재 동국대 회계학과에 재학중인 그는 지난 2006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이기도 하다.


낯선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탈북자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못다한 학업의 꿈을 이루게 됐고, 이후 자신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탈북하기 전 집안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서는 약자와 통일을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도움을 받으면서 북한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과 평온함을 느꼈고 내가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가 본격적으로 북한인권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룸메이트였던 로버트 박의 입북이었다. 지 씨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영어 공부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서 로버트 박을 처음 만났다”며 “당시 그는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던 상태였지만 나를 비롯한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북한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로버트 박은 한 달 뒤 북한을 위한 일을 꼭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며 “그때는 별 의미 없이 흘려 들었는데, 그 뒤 다시 돌아와 한국에서 북한인권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탈북자와 같이 지내고 싶다는 로버트 박의 제의로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6개월 간 로버트 박과 함께 생활했던 지 씨는 어느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됐다. 로버트 박이 김정일에게 북한인권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마침 로버트 박이 입북하기 보름 전부터 연락이 두절돼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며 “입북 소식을 접하고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25년을 산 나도 가족들에 피해가 갈까봐 뒤에 숨어 살았는데, 목숨을 걸고 입북한 로버트 박을 보며 같은 청년으로 도전정신을 느꼈다”며 당시 심정을 설명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주변 친구들과 ‘나우’를 결성해 로버트 박 구출을 위한 캠페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고, 이후 북한 문제 전반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지 씨는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로버트 박의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라고 전했다. 억류 기간 북한 당국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은 탓이었다. 그는 로버트 박이 건강을 회복하면 북한인권활동을 함께 할 예정이라며 친구의 건강이 나아지기를 기원했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이긴 하지만 아직 고향에 가족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한국에 함께 입국한 부모님도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지 씨가 공개적으로 북한인권 운동을 펼치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 자신과 북에 있는 가족에게는 위험한 일이지만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그 후에도 주변 사람들이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다.


지 씨는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미래는 청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며 북한인권운동에서의 청년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일 통일을 이뤘다 해도 북한 주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다면 안 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며 “우선 1차적으로 남북 청년들간의 소통과 화합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올해에는 남북 청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밝혔다. “다양한 분야의 청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대학가 등에서 북한인권 실태를 알릴 것”이라면서 “북한인권 활동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도 진행할 예정”이라는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