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주 연설’의 의미..北 어디로

미국 중앙정보국을 거쳐 국무부 정보조사국에서 오랫동안 한반도 문제를 다룬 로버트 칼린씨가 공개한 ‘강석주 연설’의 내용은 북한 권력의 내부 동향을 ‘솔직하게’ 전달하고 핵무기 숫자까지 처음으로 공개했다는 점에서 우선 충격적이다.

이 연설은 1990년대초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선택한 북한 수뇌부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이른 과정, 그리고 클린턴 정부 시절의 북미 관계정상화 수순,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급속히 무너져간 북미 신뢰감 등을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내용’으로 연대기처럼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현재 북한 권력내부에서 주요 정책결정이 외무성 중심의 대화파보다는 군부를 정점으로 한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핵무기가 최소 5∼6개 이상임을 솔직히 공개했다는 점에서 향후 북한 핵 문제의 향방에 이목이 집중된다.

칼린 씨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핵무기 증산에 힘을 쏟는 북한 내 강경 세력과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 압박 드라이브를 건 미국 사이에 협상 보다는 충돌의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는 점에서 파국을 점치는 시각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공관장회의가 미사일 발사와 유엔의 대북 결의안으로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7월 중하순에 열렸다는 점에서 그 후 정세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지적은 지난 14일 한미 정상이 6자회담 재개와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을 구체화하기로 하면서 외교적 노력이 급물살을 타고 미국 쪽으로부터도 유연성을 발휘하겠다는 입장이 나오고 있는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연설이 공개된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칼린 씨는 프라하에서 받은 편지에 공관장회의 때 강석주 제1부상의 연설이 `조선어’ 수기로 적혀 있었다고 소개하고 “누가 보냈는지는 묻지 말라”고 했지만 이를 두고 북한이 일부러 연설 내용을 노출시킨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연설 내용에 현재 북한 군부의 파워가 부시 행정부 초기까지에 걸친 북한 외교라인의 관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이 불응하면서 커졌다는 점이 부각되고 군부의 논리가 반영됐다는 점에서 우회적으로 미국의 대화노력을 촉구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낳고 있다.

◇ 군부가 좌우하는 북 입장 = 칼린 씨에 따르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공관장회의에서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는 듯 하다. 이제 우리는 핵보유국이고 이를 포기할 이유도, 포기할 가능성도 없다”고 말했다.

강 제1부상은 나아가 “핵개발 프로그램에 더 많은 돈과 자원을 퍼부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항할 수 없다”며 “모든 단계마다 그들이 우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그들’이란 핵무기 개발을 독려하는 강경파, 다시 말해 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강 제1부상의 언급은 현재 북한 내부의 세력 구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화파 내지 협상파에 속하는 외무성의 말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잘 먹혀들지 않고 군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전문가들의 분석과도 일치하지만 강 제1부상의 발언을 되씹어보면 전문가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군부의 파워가 북한 외교정책을 좌우하고 있다는 인상까지 준다.

게다가 강 제1부상이 2003년 3월 북한 공군의 전투기 3대가 정찰 중이던 미군 정찰기를 위협한 뒤 성공의 기쁨 때문에 만취된 공군 장교들을 보면서 외교적 노선이 끝났음을 깨달았다고 밝힌 대목은 이런 북한내 세력구도가 제2차 북핵위기 직후인 2003년부터 두드러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강 제1부상이 공관장회의 모두에서 주변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여건 조성과 경제회복 등 두가지를 지난 10년간 목표로 삼았지만 “오늘 이 두가지가 아직도 우리 목표라고 말할 수 없다”며 “솔직히 나는 더이상 알지 못한다”고 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김 위원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그가 현재 북한 수뇌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외무성을 중심으로 한 대화파의 현재 위상과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 파국이냐, 대화로 유턴이냐 = 강 제1부상의 언급에서 가장 유의할 대목은 “핵실험을 할지 안할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평양의 현 상황이 우리가 절대로 이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 상황”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는 나아가 “이제 우리는 그 결정에 영향을 끼칠 역량이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이는 북한 내 강경파를 제어할 기제가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것이고 우리의 투쟁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비록 무고한 자들의 피로 젖을테지만..”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을 북미 간 물리적 충돌까지 가정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케 만든다.

실제 강 제1부상은 북한이 5∼6개가 넘는 핵무기를 확보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핵무기의 `양적 증가’ 를 도모하고 있는 것처럼 밝히면서 북한내 강경파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채 움직이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도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아울러 미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번 칼린씨의 글을 통해 북한의 핵무기 숫자까지 공개됨에 따라 대북 제재나 압박 기조가 더욱 강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공관장회의가 열린 7월 중하순의 상황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7월 5일 북한이 대포동 2호를 포함한 7기의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국제사회의 반북 여론이 들끓으면서 일본 주도로 유엔 대북 결의안이 추진된 긴장 상황이 강 제1부상의 발언에 녹아들어갔을 것이라는 설명인 셈이다.

이 때문에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새롭게 불고 있는 대화 노력에 따라 상황이 바뀔 가능성을 내다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해 9.19 공동성명 역시 북한 군부의 목소리가 강할 때 나올 수 있었듯이 북한 역시 새로운 정세가 조성된다면 외교적 카드를 다시 꺼내들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인 것이다.

실제 한미 정상이 구체화하기로 합의한 `포괄적 접근방안’이 가시화될 경우 북한 외무성 라인에게 논리적 명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22일 북한이 6자회담 복귀의사를 밝히면 미국은 6자회담 틀 안에서든, 밖에서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북한과 금융제재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며 유연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특히 핵무기 숫자 공개는 미국 내 강경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경시한 채 북핵을 방치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미국의 북핵 정책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면서 대화파의 목소리가 세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이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두 번이나 조의를 표하고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에도 계속 대화를 희망했으나 미국이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강 제1부상의 고백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대북 동정론’까지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다만 대화의 흐름이 재개되더라도 북한내 군부의 위상과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해결을 요구한 게 북한 군부라는 점에 비춰 `포괄적 접근방안’에 BDA에 대한 해법을 담지 못한다면 본격적인 대화국면으로 접어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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