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남편 사진 품고 하늘나라로 가”

▲ 납북자가족모임이 2005년 공개한 사진. 붉은 원 안이 유 할머니의 남편인 박두현 씨

35년 전 납북됐던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져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유봉(70세) 할머니.

유 할머니는 생전에 남편의 사진을 가슴을 품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그리움이 깊었다고 한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2004년쯤 납북자 36명의 사진을 북한으로부터 입수했었는데, 그 가운데 유 할머니의 남편이 있었다”고 밝혔다.

“할머니에게 사진을 보여드리니까 크게 확대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가슴에 꼭 품고 주무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할머니는 흑백 사진 속 남편의 얼굴을 한 눈에 알아봤다. 겨우 얼굴만 보이는 사진은 확대해도 흐릿할 뿐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남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남편인 박두현(납북 당시 36세)씨는 1972년 12월 28일 서해안에서 조업을 하던 중 북한경비정에 끌려갔다. 그로부터 30여년이 넘도록 남편의 생사도 모른채 자식들을 홀로 키워왔던 할머니는 지난해 적십자로부터 남편이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상심이 컸다고 한다.

27일 오후 경남 거제시 집에서 극약을 마시고 숨져 있는 유 할머니를 같이 살던 올케가 발견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할머니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며 빈소에 모여 슬픔을 달랬다.

최 대표는 “납북자 할머니들은 누구나 가슴에 외로움을 품고 산다. 유난히 고왔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며 말을 흐렸다.

그는 “30여 년간 생사도 모르고 있던 남편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확인하게 되서 무척 좋아하셨다”며 “그러나 지난해 사망소식을 접한 뒤로 상심이 컸을 것이다. 동네 주민들 얘기로는 할머니가 그 뒤로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유 할머니는 납북자가족모임이 결성되던 2000년부터 적극적으로 활동에 동참해왔다. 지난 2003년에는 국가인권위에서 6일간이나 단식투쟁을 벌여 ‘납북자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정책권고안을 이끌어냈다.

할머니는 최근까지도 납북자가족모임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달 2일 임진각에서 열리는 가족모임 행사에도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 할머니는 ‘전후납북 피해자 보상지원법’ 시행령에 대한 공청회 무산 이후 통일부가 납북자 가족모임 최성용 대표와 가족 11명을 고소한 것과 관련, 이재정 통일부 장관 자택 앞 촛불시위와 청와대 항의시위에도 동참했다.

최 대표는 “유 할머니는 이재정 장관 집 앞에서 열린 촛불시위에도 함께 했다”며 “장관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때부터 굉장히 화가 나 계셨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청와대 앞에서의 시위가 끝난 후 인근 식당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유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5만원을 꺼내 건넸다.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최 대표는 말했다.

한편 납북자가족모임은 29일 성명을 발표하고 할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납북된 남편이 즉각 송환되지 않고 북한에서 사망한 충격으로 우울증을 알아온 결과”라며 “(할머니의 죽음은) 1차적으로 북한 김정일 정권에 책임이 있으며, 2차적으로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노무현 정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납북자 문제를 의제로 채택해 납북자들의 생사확인 및 전원 송환을 이뤄내야 한다”고 밝히고, 통일부 장관의 교체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