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소련 외무, 北냉대에 한국과 조기수교”

1990년 9월 30일 이뤄진 한국과 구(舊)소련의 역사적 수교는 남한정부에 대한 소련의 승인 계획을 전해 들은 김일성 주석 등 당시 북한 지도부의 강력한 반발과 냉대로 예정보다 오히려 3개월가량 앞당겨졌다는 주장이 양국 수교 20주년을 앞두고 제기됐다.


◇ “북한의 반발.냉대로 한-소 조기 수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의 한국 담당 선임연구원인 김영웅(69) 박사는 7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애초 한-소 수교에 반대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수교 결심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 북한을 설득하러 9월 초 북한을 방문했으나 그곳에서 심한 냉대를 받자 격분해 오히려 조기 수교 쪽으로 선회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고려인 2세로는 처음으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을 지내 크렘린내 사정에 정통한 인물이다.


이에 앞서 지난 1∼2일(한국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 11차 한-러 포럼’에 참석한 러시아 전문가인 김석환 주성대학교 부총장도 ‘한.러 수교 20년 그 경험과 과제’ 제목의 발제에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당시 평양 방문 중 김일성 주석이 면담을 거부한데다 김영남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면전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판단, 한-소 수교를 앞당겼다는 게 양국 협상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소개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외무는 유엔총회 기간인 1990년 9월 30일 안보리 소회의실에서 1차 한.소 외무장관 회담을 갖고 대사급 수교에 합의한 뒤 “효력은 서명직후 발효된다”고 선언해 외교적으로 극히 이례적인 수교 사례가 발생했다.


원래 소련측은 북한 외에도 수교에 비판적인 자국내 보수 세력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이듬해 1월 1일자로 수교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한국도 ‘1991년 1월 1일’자로 기록된 수교문서를 준비했으나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즉석에서 ‘9월 30일자로 발효한다’고 수정해 기입했다는 것이다.


주성대 김 부총장은 이에 대한 근거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정치국원 등 당시 소련과 한국의 관리, 외교관들과의 광범위한 접촉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권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인사로 이번 한-러 포럼에 참석한 김학준 동아일보 고문도 “당시 수교 작업이 워낙 극비리에 진행되다 보니 소련 외무부와 KGB(국가보안위원회) 모두 발표 직전에야 알았다”며 “셰바르드나제는 버티다가 결국 막판에 조기 수교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교협정문에 서명한 최 전 외무장관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유엔총회 참석에 앞서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내 러시아에 가고 싶으니 연내 수교가 되도록 진력해달라’고 지시, 뉴욕에서 9월 27일 아.태 연안국 외무장관회의에 참석 도중 셰바르드나제에게 면담을 요청해 수교 합의 후 당장 발효되도록 조치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셰바르드나제는 처음에는 본국의 방침(1991년 1월 1일자 발효)을 들어 난색을 표명했으나 최 장관이 거듭 설득하자 “그럼 그렇게 하자”고 전격적으로 결심했다는 것.


최 전 장관은 “셰바르드나제는 지난 2000년에 열린 수교 10주년 기념식에서 나한테 ‘북한에서 모욕을 당해 격분해 있던 중 마침 한국 측의 끈질긴 제의가 있어 수용했다’고 조기 수교 배경을 밝혔다”며 “그의 독자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추후 모스크바로부터 변경된 훈령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한편 김영웅 박사는 셰바르드나제와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경쟁관계도 한-소 조기 수교의 한 배경으로 설명했다. 셰바르드나제는 이미 수교 방침을 정한 대통령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지시에 따르면서도 장관에게 주어진 권한을 활용해 자신의 나름의 업적을 남기려고 독자적으로 조기 수교 결정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나중에 알아봤더니 셰바르드나제는 원래 소련을 좋아하지 않았다”며 “그는 ‘대통령뿐 아니라 외무장관인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보수-개혁파 투쟁 등) 소련의 국내 상황을 크게 개의치 않은 나머지 조기 수교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셰바르드나제는 소련 해체 후 고향인 그루지야로 돌아가 대통령까지 역임했으며 재임 시절이던 2001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미국에 자국내 군사기지를 제공함으로써 러시아와 첨예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 “셰바르드나제는 원래 ‘수교 반대’의 선봉”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외교 고문’으로 ‘YS-고르비’ 회동을 주선했던 인사인 정재문 전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은 한-소 수교를 놓고 당시 소련 내 보수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고 전했다.


소련 과학원 산하 국책연구소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의 마르티노프 전 소장도 정재문 전 의원의 회고록 ‘소련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나의 모스크바 담판’에 실린 ‘발간 축사’에서 “2인자격인 야코블레코 정치국원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소련방문 일정을 공식 지지했는데도 저항 세력들은 한국대표단의 고위층 접촉을 사사건건 방해했으며 그 중심에 셰바르드나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즉 셰바르드나제는 한국의 고위층이 소련과 접촉하거나 한-소 수교가 이뤄지는 것에 매우 반대하는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고르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도 미리 조율”
한편 노태우 정권의 ‘북방 밀사’였던 박철언 대통령 특보의 외교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강근택(65)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관계개선 방침을 처음 시사한 극동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1988년 9월 16일)의 문안을 준비하는 데 한국측이 모종의 역할을 했다”면서 이런 노력이 나중에 한-소 수교의 밑거름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사전에 크렘린 측과 수차례 교섭한 끝에 고르바초프가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에서 한국의 경제력을 높이 평가하는 연설을 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이에 화답해 한달 뒤 유엔총회 연설에서 대(對)소련 관계 개선 의지를 강조한 것은 양측의 사전 조율에 따른 것이다”고 밝혔다.


강 전 대사는 “고르바초프가 앞서 1986년 7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행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대(對)아시아 정책에 대한 연설문을 입수, 한글판으로 만들어 고르바초프 비서실장에게 전달해 한국이 소련과의 수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 주효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강 전 대사는 또 수교원칙의 합의를 이끈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1990년 6월)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소련 당국이 지정한 메신저 역할을 한 노보스티 통신 특파원과 수시로 접촉, 의견 교환을 했는데 보안 유지를 위해 통역 없이 단독 회동을 했고, 도청을 우려해 영어로 나눈 대화도 필담으로 진행했다고 소개했다.


김학준 고문은 이 정상회담과 관련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고르바초프가 방미 후 귀국길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르니 접촉해보라’고 권유하자 노태우 대통령이 이를 추진하도록 지시했다”며 “실무자들은 실현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뜻에서 암호명을 ‘5%’로 정했는데 결국 극적으로 성사됐다”고 회고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