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동독에도 교화소가 있었다는데 실체는?

마르코트(Margot Honecker) 여사는 여성으로서 동독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자, 공포의 대명사였다. 남편 에리히 호네커 총서기도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마르코트는 1950년 22세의 최연소 나이로 동독 최고 권력기관인 인민회의 의원이 됐고, 1963년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교육부장관직에 올랐다. 교육부장관 취임은 마르코트 여사가 동독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계기였다. 교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학교 정규과목에 군사학을 도입한 것도 마르코트의 결정이었다.

중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진 마르코트 여사는 교육에 대해 대단히 강한 집착을 보였다. 청소년 교육은 사회주의 건설과 그에 맞는 인간을 길러내는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교육철학이었다. 사회주의에 만연했던 훈장제도도 이와 같은 교육철학 실현을 위해 이용됐고, 자신도 이 제도에 편승해 적지 않은 훈장과 박사학위 타이틀을 얻었다.

반대로 마르코트의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철저히 격리·수용돼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통일 후 밝혀진 이에 대한 실체는 작센 주 ‘토어가우’라는 소도시에 위치한 청소년 교화소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교육부가 관장하고 있던 이 기관은 일반 소년원보다도 더 가혹한 형벌과 훈련이 가해지는 곳으로 동독에서 가장 끔찍한 청소년 교화소였다.

동독의 청소년들에게 ‘토어가우’는 훈련과 형벌, 공포의 상징이었다. 가혹한 형벌은 물론 탈옥을 막기 위한 삼엄한 경비에 경비견까지 투입됐다.

청소년들이 이곳에 수용된 이유도 범죄사유라기 보다는 단순히 학교에 가지 않거나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심지어 서방세계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청취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수감된 청소년들은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아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을 받고 있었다.

지난 1965년부터 89년 동독이 해체될 때까지 매년 200여명의 청소년들이 수감됐고, 14세에서 18세까지의 남녀 청소년들이 피해자들이었다. “당신들은 태양이 전혀 웃지 않는 도시를 아느냐, 이곳이 토어가우이며 이곳에서 사람들이 바보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낙서들이 이곳 생활의 처참함을 말해주고 있다.

1989년 반공투쟁이 본격화되고 공산당의 실체가 하나 둘씩 드러나게 되자, 마르코트 여사는 같은 해 11월 3일 ‘토어가우’ 교화소의 해체를 서둘러 지시했다. 동독 주민들의 반발도 거셌다. 위협을 느낀 호네커 부부는 급기야 고향을 떠나 그들이 그토록 탄압했던 교회로 찾아가 신변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를린 근교에 있었던 소련군 병원에 체류하다가 모스크바 주재 칠레대사관으로 망명했다. 통일 10주년을 맞아 독일 언론들이 그녀가 딸 손야와 함께 외로이 살고 있는 산티아고를 찾았다.

인터뷰 요청에 마르코트는 “자본주의가 동독을 집어삼키고 있다. 통일 후 동독에 일부 잘 나가는 계층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대다수 동독인들의 희생으로 점점 부유해지고 있다”며 과거 동독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특히 “거짓말은 크면 클수록 믿어지기 쉽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거짓말에 현혹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독일통일에 대한 그녀의 평가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이 75세 노인의 편집증적 애착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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