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HEU재점화…“北核검증위한 압박전술”

지난해 초부터 북핵 6자회담 진전을 위해 한국과 미국 정부가 기존 입장에서 후퇴했던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문제가 최근 들어 미국 내에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어 주목된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6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후 기자회견에서 검증 대상과 관련, 플루토늄 뿐 아니라 “농축우라늄폭탄과 핵확산 의혹에 대해서도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고, 사전 배포된 태국 방문 성명서를 통해서도 거듭 강조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했다.

앞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지난 6월 28일 한미 외교장관회담 이후 회견에서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와 관련, “HEU와 핵확산활동에 대한 내용도 들어가 있지만 우리가 필요한 충분한 답은 담겨있지 않다”면서 “기대하건데 북한이 그러한 약속(검증하겠다는)을 이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HEU문제는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일행과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부상 간 대좌에서 논란이 불거졌고, 이후 2차 북핵위기 발발의 원인이 됐다.

이후 미국은 북한의 HEU 보유 의혹을 해소하라고 압박했고 북한은 “증거를 먼저 제시하라”고 맞서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러다 6자회담 진행과정에서 HEU 대신 UEP(우라늄농축프로그램)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북한이 ‘2·13, 10·3’합의에 따른 핵 프로그램 제출 시한을 넘기며 6자회담이 장기 공전상태에 놓이자 미국과 북한은 지난 4월 싱가포르에서 회동을 갖고 플루토늄 프로그램과 UEP·핵확산 문제를 분리하는 방식의 편법에 합의했다.

당시 북핵 6자회담 미·북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플루토늄 항목은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는 핵 프로그램 신고서에 담고, UEP·핵확산 문제는 미북 양측이 공유하는 비밀문서에 담기로 합의했다.

UEP·핵확산 문제에 발목이 잡혀 북핵문제가 장기 공전되기 보다는 한발 양보해 6자회담을 재개하고 현실적인 위협인 플루토늄 프로그램 폐기에 집중하겠다는 미국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 성과’에 사로잡혀 UEP·핵확산 문제를 덮고 가려는 것 아니냐는 미 의회 강경파들의 불만이 제기됐지만 차츰 사그라졌고 부시 행정부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절차와 대북한 식량지원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한동안 거론되지 않았던 HEU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외교소식통들은 이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확실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즉 HEU에 대한 ‘물증’을 미국 측이 확보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난해 말 미국 측에 전달한 알루미늄관이나 지난 5월초 미측에 제시한 1만8천822쪽의 핵관련 자료에서도 ‘HEU 흔적’이 노출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제출한 자료가 오히려 확실한 ‘물증’을 제공한 셈이다.

결국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말 알루미늄관에서 HEU 흔적이 나온 뒤부터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하다가 지난 5월 북한이 건네준 핵 관련 자료에서 HEU 흔적이 발견된 시점을 전후해 2차 핵위기 발발 원인이 됐던 HEU에 대한 ‘심각성’을 재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6일 미국이 지난달 6자 수석대표회담에서 북한에 제시한 4쪽짜리 핵검증 이행계획 초안에 검증 대상으로 ‘플루토늄 생산, 우라늄 농축, 무기, 무기제조와 실험, 나아가 핵확산 활동을 포함한 모든 핵계획의 요소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 제공’이라고 규정한 것으로 보도했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검증 대상에 우라늄 농축, 보다 구체적으로는 HEU에 대한 확실한 검증을 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결국 2002년 10월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HEU문제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2차 진실게임이 시작된 셈이다.

외교소식통은 “미국으로서는 의심할 만한 상황이 된만큼 확실하게 북한의 해명과 객관적 검증을 요구해야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북한이 지난 6년간 부인해온 HEU문제, 그리고 핵확산 문제를 검증하는데 동의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난항을 겪고 있는 검증체계 구축에 극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북핵문제는 또다시 장기 공전상태에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 또 북한이 기대하는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도 오는 11일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김태우 국방연구원 군비통제연구실장은 “미국은 오는 11일까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며 “예정대로 명단에서 빼줄 것인지 아니면 북한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할 것인지 중대한 기로에 선 셈이다”고 HEU문제가 불거진 배경을 설명했다.

김 연구실장은 “이런 상황에서 HEU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미국이 선택의 폭을 넓히려고 하는 것”이라며 “북한이 검증체계 구축에 계속 고자세를 취하자 미국이 언젠가는 짚어야 할 문제인 HEU 문제를 내세워 압박하고 역공세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검증체계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유보하고 HEU문제를 계속 거론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HEU·핵확산 문제를 얼버무려 넘어가려다가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치자 검증하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는데, 북한이 이를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신고서의 미진한 부분을 ‘검증’과정에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북한과 싱가포르 합의를 성사시켰지만 북한은 ‘합의’대로만 할 것”이라며 “결국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도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