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한’을 앞두고 북미 간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계속되는 한 핵 문제와 관련된 논의는 향후 협상테이블에서 내려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미국이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하는 등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또다시 ‘모든 대조선(북한)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자 현실적으로 올해 안에 비핵화 협상의 성과를 도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높아지고 있다.
최 제1부상은 20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 러시아 외무부 인사들과 회담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 쪽에 전할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메시지는 없고 이제는 아마 핵문제 관련 논의는 앞으로 협상탁(테이블)에서 내려지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국과 앞으로 협상하자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다 철회해야 핵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및 안전보장과 같은 군사적 문제, 대북제재 해제 등을 포함한 경제 부분, 그리고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총 망라한 적대시정책을 철회해야 비핵화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최 제1부상은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 여부에 대해선 “얘기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도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계속하면 좀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한미가 18일부터 실시하려던 연합 공중훈련을 유예하고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북한이 전제조건이나 주저함 없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기를 촉구한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외무성은 연합훈련 유예 발표 직후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한미연합훈련 완전 중단을 요구했다. 게다가 최 제1부상까지 ‘핵문제가 협상 테이블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자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비핵화 협상을 도출하기 어려워진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21일 데일리NK에 “물리적 시간상 당장 12월 중에 북미가 만나 비핵화에 대한 접근 방법과 쟁점 차이를 정리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김정은이 지난 4월 시정연설에서 연말시한을 못박았을 때까지는 미국이 셈법을 바꾸고 양측의 합의를 거쳐 정상회담까지 마무리는 되는 방식의 스케쥴을 계획했겠지만 그게 현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라고 밝혔다.
박원곤 한동대학교 국제지역학과 교수도 “12월 북미 양측의 만남 자체도 잘 모르겠고 만나도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는 “일단 만나야 북한이 원하는 정도를 알고 타협을 할텐데 북한이 원하는 정도를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몰아붙이는 상황이니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고위급 탈북민도 “미국이 제재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결단이 있지 않으면 북한은 새로운 길로 돌아설 작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은 마치 제재 철회를 신념처럼 생각하고 먼저 조치를 취해선 안 될 것처럼 하고 있는데 미국이 선조치를 보이지 않으면 핵협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완전 철회’라는 북한의 방대한 요구를 미국이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언급하는 것은 이미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내부 방침이 포함된 것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박 교수는 “북한은 미국이 받을 수 없는 카드를 내 놓으면서 전혀 꿈쩍도 안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단순히 협상력을 높이려는 게 아니라 이것이 북한의 최종 입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북한이 스스로 연말이라는 데드라인을 만들면서 스스로 퇴로를 막아버렸고, 북한에 명분을 주기 위해 연합훈련도 유예하고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곧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것으로도 안 된다고 하니까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며 “플랜B를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협상이 결렬되고 북한이 핵실험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도발로 돌아설 경우 그 이후의 조치까지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다만 이번 최 부상의 발언이 비핵화 협상을 완전 깨고 ‘새로운 길’로 나서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홍 실장은 “비핵화를 완전히 내려놨다는 게 아니라 적대시 정책 청산이 없다면 비핵화 문제는 없다는 맥락”이라며 “적대시 정책을 해제하는 상징적인 조치들이 이뤄질 경우 비핵화 관련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의미에 중점을 둬야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당장 대북제재를 해제할 수는 없겠지만 북한이 우려하는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시그널을 보여준다면 북한도 비핵화 테이블에 복귀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어 홍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선언적인 발언을 해 줄 필요도 있다”며 “북한의 요구에 대해 무시하는 방식으로 침묵하기 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 북미 협상을 통해 향후 논의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해준다면 북한으로서는 협상테이블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 연말을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완전히 닫힌 결말이 되지 않도록 대화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이 선비핵화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요구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고 올해 실무협상만 하더라도 내년 초까지 실무협상을 연결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이어가는 정도만 해도 연말을 의미있게 넘길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