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북 식량지원 발표…정부 `묘안’찾을까

미국이 다음 달부터 북한에 50만t의 식량을 12개월간에 걸쳐 지원키로 했다고 현지시간 16일 발표함에 따라 우리 정부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의 지원 결정은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를 놓고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정부 입장에서는 ‘생각할 시간’을 준 한편으로 정치적 차원에서의 ‘압박’을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지만 정부가 대북 지원을 결정하기까지 핵심 변수는 ‘여론과 북의 태도’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미 식량지원의 양면성 = 올해 최소한의 수요량에도 130만t 가량 부족한 북한의 식량사정으로 볼때 미국 지원이 해갈은 못해 주더라도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의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해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50만t이라는 ‘약속어음’을 확보한 것이 주민들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 효과가 클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만약 미국의 지원결정이 늦어지고 북한의 식량상황이 악화일로를 달릴 경우 국내외 여론상 정부가 ‘북의 지원요청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인 만큼 정부로선 이번 미국의 지원 결정으로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절박한 호소를 잠시 피해 입장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런 반면 미국의 지원 결정은 본의 아니게 정치적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물론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은 오래전 예고됐고 이 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에 대해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와 공조가 이뤄지고 있기에 정부가 적절한 대응 기조를 세워두고 있을 것이란 기대가 많다.

그러나 북한이 핵 신고.불능화와 맞물린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가시권 안에 둔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식량까지 상당량 확보한 만큼 남측과 거리를 두는 대신 북미관계 개선에 ‘올인’함으로써 활로를 찾는 전략을 더욱 노골화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즉 남측과는 ‘6.15, 10.4 선언 이행 약속’이 담보되지 않는 한 계속 각을 세우려 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 정부로서는 북.미 관계의 진전 속에 남북관계가 파행을 겪는 상황을 계속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의 압박을 더욱 받게될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북관계 원칙과 현실론 사이서 정부 선택은 = 이런 점에서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 결정은 정부에게 큰 틀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북한 식량문제와 관련한 화급한 불은 진화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북한이 먼저 요청을 해야 지원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길과 남북 당국간 대화 복원을 적극 모색함으로써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길’이 그 것이다.

이는 결국 현 정부가 ‘퍼주기’였다고 규정하는 과거 정부의 대북지원 양태와 차별성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남북관계 관행을 만드는 일과 비핵화 논의가 중대 국면에 온 지금 주변 정세의 한 축인 남북 관계를 조기에 복원하는 일 중 우선 순위를 어느 쪽에 두느냐와 직결된 문제로 보인다.

정부 ‘핵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현재 두 가지 길을 놓고 분명한 입장정리가 안된 듯 하지만 최근 당국자들은 한동안 되풀이했던 ‘선(先) 지원 요청 후 지원’ 원칙의 언급 빈도를 줄이면서 운신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는 듯한 모양새다.

이와 관련, 이명박 대통령은 16일 “인도적 지원은 여건이 갖춰지면 핵문제와 관계없이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여건’이라는 한결 추상적인 전제를 달았고 유명환 외교장관은 지난 15일 “북한하고 기회가 되면 (식량문제에 대해) 직접 협의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언급들에서 보듯 정부는 북한이 먼저 요청을 해야한다는 원칙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중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해 수해지원 명목으로 북에 주려했다가 공급이 미뤄진 옥수수 5만t 카드와 올해 남북협력기금 사용계획에 반영된 1천974억원의 쌀차관 제공 예산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상황과 조건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핵심변수는 여론과 북한 태도 =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정부의 선택에는 여론의 향배와 북한의 태도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말을 아껴온 김하중 통일장관이 15일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 충분히 고려하면서 대북정책을 추진할 생각”이라고 말한 것도 정부가 여론의 동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또 지난 2일 정부 고위 당국자가 “남북간 대화를 위해 북한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중지해 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듯 북한의 태도는 우리 정부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이 대남 비방공세를 일정기간 중단할 경우 정부가 ‘남북간 현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자’며 과감한 대화 제의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보고 있다.

식량에 관한 한 ‘선 요청, 후 지원’의 못을 박아 두고 있지만 대화 재개의 화제가 꼭 식량문제일 필요는 없는 법이어서 일단 대화의 문을 열면 정부가 천명한 원칙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지원할 수 있는 ‘묘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그 경우에도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6.15 선언과 10.4 선언 이행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입장 표명을 요구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에 대화의 문을 여는 일 또한 결코 간단치는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