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와 관련, 연일 강도 높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구체적인 신고 시한을 제시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방한 중인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 힐 차관보는 2일 이용준 외교부 차관보와 협의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북한으로부터 2~3일 내에 신고문제에 대해 새로운 것을 들어야 한다”며 구체적인 시한을 제시했다.
힐 차관보는 “(핵 프로그램 신고 협의는)아직 완료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플루토늄 추출량과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 북-시리아 핵 협력 의혹 등이 신고 내용에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0∙3합의’ 이후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 마감시한을 넘기면서 3개월째 교착상태에 빠진 6자회담의 모멘텀(추진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동안 미국과 북한은 뉴욕채널을 밀고 당기는 신고서 문안 협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북 ‘제네바 회동’ 이후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됐던 핵 신고 문제는 핵심 쟁점인 UEP와 시리아 핵 협력 의혹에 대한 의견차로 답보상태에 놓여 있는 상태다. 미국은 모든 부분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요구하는 반면, 북한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없다”며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핵 신고가 문제를 둘러싼 미북간 의견차의 진척이 없자, 시간에 쫓기는 미국은 북핵 협상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경고와 달래기를 투트랙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앞서 힐 차관보는 1일 “누구도 우리보다 나은 조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북한의 핵 신고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북한의 핵 신고가 계속 지연된다면 대화 이외에 대북지원 속도조절 및 추가 제재 등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힐 차관보는 1일 “(대화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면 분명히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힐 차관보는 방한 직전에도 “인내심이 닳아 없어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도 그는 “우리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핵 프로그램 신고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초조함이 역력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힐 차관보가 2일 구체적인 시한까지 언급하며 북한의 핵신고를 촉구하고 나선 것과 관련, 일각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미국과 북한이 UEP문제와 시리아 핵 협력 의혹에 대한 신고방안에 타협점을 찾았다는 것.
외교가에 따르면 북한이 UEP와 시리아 핵 협력 의혹을 간접 시인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농축우라늄과 시리아 핵협력 의혹에 대해 북한이 직접 시인을 하지 않는 대신 미국은 이행사항을 기술하고 북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이 오는 4일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회동할 가능성이 관측되고 있다. 회동이 성사된다면 핵 프로그램 신고와 관련한 북한 측 입장이 결정됐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측은 힐 차관보가 1일 서울에 도착한 뒤 자카르타 회동에 대한 입장을 미측에 전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힐 차관보의 ‘진전된 내용이 없으면 만나지 않겠다’는 언급을 들어 “자카르타 회동이 현실화 된다면 북핵 2단계와 관련, 미북간 ‘합의’가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 교수는 “이는 곧 북한이 미국이 제시한 (UEP와 시리아 핵협력 등에 대한)간접시인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라며 “미국은 합의 이후 곧바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의 조치에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북미 협상 결과에 부정적인 의견도 많다. 정부 소식통은 “미국과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와 관련해 합의를 도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면서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외교채널을 통해)계속 협의 중이다”고 했다.
김태우 국방연구원 군비통제연구실장도 “북핵 문제의 표류에 따른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라며 “힐 차관보의 발언(2~3일 내 새로운 것을 들어야 한다)은 북한을 재촉하고 경고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김 연구실장은 이어 “미국의 대북한 압박 강도가 강해졌다고 해서 미 대선이 임박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도 “점점 인내가 다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며 “제네바 회동 당시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자카르타 회동’이 현실화 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