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시절인 1981년 6월 5일 북한에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공식 제의했지만, 북한이 이를 거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통상부가 18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7월 1일 6.25 전쟁 중 납북된 한국의 정치사회지도자들로 구성된 ‘전 남한 정치인협회’ 기념식에서 “한국의 현 정권과는 민족의 단결과 화해를 실현할 수 없고 조국통일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 제안도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는 북한이 수락할 때까지 정상회담 제의를 지속할 것이란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는 이날 접수한 지 30년이 지난 1981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18만 쪽 1,337권에 달하는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또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올림픽위원회의 ’88서울올림픽’ 개최 결정 당시 공산권은 유치 방해활동을 펼쳤다. 총회 개최 9일 전인 9월 21일 북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신원불명의 2명이 남한대표들이 머물던 숙소에 잠입해 수상한 행동을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앞서 9월 20일 개최된 IOC 집행위원회에서 소련 위원은 “한국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며, 과거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예가 있다”며 “서울 개최시 사회주의 국가는 참가를 거부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정부는 ’88서울올림픽’ 개최 지지를 얻기 위해 공격적인 유치활동을 펼쳐 9월 30일 열린 바덴바덴 총회에서 일본 나고야에 52대 27로 압승을 거둬, 유치를 성사시켰다.
또 문서에 따르면 1981년 8월 26일 평상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던 주한미군 고공 정찰기 SR-71 블랙버드 1대가 한국 영공과 공해상공을 비행하던 중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당시 정부는 미국이 북한에 강경한 자세를 유지해 줄 것을 촉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미 국무성은 사건 발발 다음날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을 상대로 한 군사적 도발을 묵인하지 않겠다”며 “SR-71정찰기의 정찰 활동을 계속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부인하며 SR-71이 북한의 영공을 침범한 것이라고 반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우리 정부는 리비아와 수교를 맺기까지 이를 막으려던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숱한 방해공작에도 한국은 리비아와의 수차례 교섭 끝에 20년만인 1980년 12월 리비아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에 앞서 북한은 1975년 비밀리에 추진되던 리비아 군사사절단의 한국 방문을 중간에서 무산시켰고, 북한이 리비아 주간지에 선전 광고를 게재하자 남한 외교관들은 “북한의 국제공산주의 선전에 이용당해서는 안 된다”며 견제에 나섰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외에도 외교문서에는 ‘김대중 재판’ ‘한·미간 이란주재 미국 외교관 인질사건 관련 협조’ ‘미국의 대한 안보정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날 공개된 1981년도 외교문서는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