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정부 안팎서 北 HEU 프로그램 정보평가 재검토론

2.13 북핵 합의 이후 한국과 미국 양국 내에서 이 합의에 대한 관점에 따라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북한의 HEU 프로그램을 기정사실화했던 미국의 정보 평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 정부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는 2003년 이라크전을 개전하기 앞서 이라크, 북한 등 이른바 ‘악의 축’ 나라들을 단죄하기 위한 논고 방식의 접근법을 취했던 미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협상을 통한 해결이라는 현실주의적 접근법으로 선회하는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주목된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북한의 HEU 프로그램 추진을 이유로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할 때부터 부시 행정부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해온 핵전문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ISIS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북한의 HEU 프로그램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제 이 의심스러운 주장을 재검토할 때가 됐다”며 ‘증거 부족’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북핵 협상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22일 브루킹스 연구소 강연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관해 언급한 내용도, 그동안 부시 행정부가 취해온 입장에 비해 어조가 상당히 변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이 HEU 프로그램과 아주 일치하는 장비를 구입했다”고 적시했으나,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단정하기 보다는 알루미늄 관의 구입이 일으킨 HEU 프로그램 의혹을 사실이면 사실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왜 그런 것을 구입했는지 명백히 설명하라는 요구에 초점을 맞췄다.

힐 차관보는 “HEU 프로그램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북한이 구입한 것보다 더 많은 장비와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해, 북한이 대규모 HEU 시설을 갖추고 어쩌면 2003년 말까지는 이미 HEU를 생산했을 수도 있다는 시사를 해온 기존의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 퇴로를 준비하는 듯한 인상도 남겼다.

그는 북한이 구입한 장비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북한의 HEU 프로그램 관련 기술 수준에 대해선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9.19 공동성명 발표 후에도 북한의 HEU 프로그램 의혹에 대해 알루미늄관을 HEU 프로그램에 사용하지 않고 가령 학교 시설에 사용했다면 그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촉구했었다.

◇올브라이트 소장 보고서

그는 “북한의 핵능력을 말할 때면 북한이 매년 여러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만큼 대규모 우라늄농축 공장을 갖고 있거나 짓고 있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일이 자주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원심분리기 수십개를 조립하는 정도의 소규모 프로그램과 완성된 원심분리기 수천개의 제조를 포함한 대규모 생산 공장을 짓거나 운영하는 것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 최근 뉴스위크 국제판에서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해체대상 핵시설 목록에 포함하지 않으면 핵협상은 진전될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을 소개하고 “그러나 대규모 원심분리기 공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아마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HEU 프로그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 관련 의심을 살만 한 장비들을 구입한 사실은 올브라이트 소장도 “풍부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악명높은 파키스탄의 칸 박사로부터 원심분리기 시동장치 1벌을 포함해 소규모 가스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을 위한 장비와 원심분리기를 구입했고, 소규모 프로그램용 많은 부품들을 해외에서 구입”했지만, 어떤 상태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북한의 제한된 기술력을 감안하면 민감한 원심분리기 부품들은 대량 해외에서 구매하려 했을 것인데, 지난 수년간 이에 관한 증거가 나온 게 없다”고 지적하고, “북한의 핵프로그램에 관한 정보에 정통한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지난 1월 관련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CIA가 북한의 알루미늄 관 구입을 HEU 프로그램용이라고 정보평가한 시점이, 이라크의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대량 주문이 사실은 로켓탄용인데도 우라늄농축용이라고 잘못 평가한 것과 같은 때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북한의 원심분리기에 관한 과거의 정보평가에 우려를 제기하게 된다”고 올브라이트 소장은 주장했다. ‘악의 축’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는 최근 조엘 위트 전략국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과 함께 방북했을 때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이 계속 부인하면서도 “북한 정부는 이 문제를 깨끗하게 풀 의지”가 있다며, 미국이 서면 증거를 제시하면 북한은 그에 답변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자신감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북한이 구입한 알루미늄 관은 P-2형 원심분리기 부품용이 맞다며, ▲북한이 체제의 특성상, 실제론 작동하는 원심분리기 시설을 만들 능력이 없으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사서 그냥 창고에 쌓아놓고 있을 가능성 ▲다른 누군가를 위해 대신 구입했을 가능성 ▲실제 농축공장 건설을 시작했다가 시작에 그쳤을 가능성 등을 추정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북한의 가스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에 관해선 의문이 있고, 2.13 합의가 진전되려면 이 의문들이 풀려야 한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결함 있는 2002년의 정보평가가 핵합의를 훼손하거나, 앞으로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 내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왜곡시켜선 안된다”고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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