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권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국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미 행정부 일각에서 남북관계를 북한의 비핵화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미국을 방문중인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은 15일 워싱턴특파원 간담회에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의 면담내용을 소개하면서 힐 차관보는 “남북관계와 6자회담이 같이 가야 한다”면서 “북한이 6자회담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데니스 와일더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도 “남북정상회담 시기문제는 북한의 비핵화를 지켜보면서 한미공조하에 결정해야 한다”고 `한미공조’를 강조했다고 신 위원장은 전했다.
와일더 보좌관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북한이 선의를 보이지 않고 있어 지금은 적절치 않다”고 선을 그은 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방북초청, 핵시설 폐쇄 검증 허용 등 비핵화 이행을 위한 1단계조치를 마친 뒤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미 관리들의 이 같은 발언은 특히 4국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이해찬 전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하고 있는 와중에 터져나와 미국의 의도 등을 둘러싸고 더욱 미묘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물론 이번 미국 관리들의 발언은 공개적으로 확인된 게 아니라 범여권 대선후보군 중의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어 이 전 총리와 경쟁적 위치에 있는 인사를 통해 전해졌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들의 언급은 북한 비핵화를 최우선의 정책과제로 삼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한국내 범여권의 생각과는 출발부터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인 미국은 북한의 대외적인 정치.경제적 관계개선 문제를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 지렛대로 삼기를 희망하고 있다. 미국이 2.13 합의 이후 한국 정부의 대북 쌀.비료 지원 계획에 대해 북한의 2.13합의 이행과 보조를 맞출 것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선과정에 정치적 상황을 의식해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일방적으로 진전시키려 할 경우 실질적인 성과보다는 북한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들 관리들의 견해인 것.
힐 차관보가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르다 보면 북한이 한미관계를 이간하는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한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4국 정상회담도 미국 관리들은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북한이 핵프로그램 포기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 뒤 검토할 수 있다고 신중한 입장이다.
또 일부 미국 관리들은 4국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많고 아직 구체적인 착수조차 못하고 있는 시점인데도 한국에선 너무 쉽게 정상회담이 거론되고 있다며 정치적 고려가 우선시되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내비치고 있다.
이 때문에 미 관리들은 한미공조를 역설하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한국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6자회담 참가국인 중국, 러시아, 일본 등에게도 5개국이 한 목소리를 내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며 공조를 강조해왔다.
따라서 남북정상회담이나 4국 정상회담이 미국의 지지를 얻으며 탄력을 받기 위해선 북한의 태도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신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불법자금, 평화협정 체결 문제 등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이며 북한의 비핵화를 계속 유도하고 있다.
힐 차관보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와 관련, “한반도 정전협정 체제를 종전협정 체제로 전환하는 절차는 영변핵시설 폐쇄와 동시에 착수가 가능하다”고 언급,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 핵을 모두 폐기해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을 좀 더 구체화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