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1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양자 회동을 가질 예정인 가운데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핵 프로그램 신고 형식에서 유연성을 시사해 주목된다.
이에 따라 북한 핵 프로그램 신고에서 플루토늄과 핵심 쟁점인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및 시리아 핵확산 신고 문제가 분리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힐 차관보는 12일 미 상원 ‘미-베트남 양자관계’ 청문회에 참석한 뒤, 이번 회담에서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와 북핵 3단계 진입이 주된 의제가 될 것이라며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어떻게 받을지, 신고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등 형식에 대해선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형식의 유연성이 ‘완전하고 정확한’ 핵신고에 대한 유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무엇보다도 북한은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형식의 유연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신고의 형식보다 신고의 실체가 더 중요하다”면서 “전면적이고 완전한 신고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미국은 북핵 6자회담 ‘2∙13합의’와 ‘10∙3공동선언’을 통해 플루토늄 추출량과 UEP개발 의혹, 시리아 핵확산 의혹 등 3가지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촉구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UEP개발과 시리아 핵이전 의혹에 대해선 사실 자체를 부인, 핵 신고내역에 이를 포함할 수 없다고 거부해왔다. 이로 인해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 마감시한을 넘기면서 북핵 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 “북한 핵 신고서에서 HEU(고농축우라늄) 및 시리아 핵확산 의혹 문제를 (플루토늄과)분리하는 게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단 미국은 핵신고 문제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6자회담을 이어가기 위해 ‘형식의 유연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교적 성과를 위해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급선회하면서까지 유지했던 북한과의 대화 분위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완전하고 정확한’ 핵신고를 언급한 것은 제2차 북핵위기를 일으킨 북한의 UEP의 존재 및 신고 여부와 시리아와의 핵 협력설을 비롯한 북한의 핵확산 시도 여부가 3단계 북핵폐기 진전에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중국은 핵 신고의 쟁점 사항인 UEP 문제와 핵확산 의혹 등에 대해 미국과 북한 양측의 입장을 나란히 병기하는 형태의 절충안을 제안했고, 이에 대해 미국은 ‘수용 가능’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6자회담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3월 핵 신고 마감’을 강조해왔다. 대통령선거 전 외교적 성과를 바라는 부시 행정부는 적어도 3월 중에는 핵 신고 방안이 타결돼야 폐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추진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 측은 핵신고 문제를 비롯, 비핵화 3단계인 핵폐기 로드맵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과 별도의 회동을 갖는 방안을 집중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이번 제네바 회담은 앞서 중국과 미국의 절충안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게 외교가의 관측이다. 힐 차관보도 “이번 제네바 회동 제안은 북한측 제의로 성사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플루토늄 추출량 신고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UEP 문제와 핵 확산 의혹은 부인했던 북한이 중국측의 절충안에 대한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는 확실치 않다.
미국 대선과 임기 말 외교적 성과에 집착한 미국과 대화는 유지하면서 정치∙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확보하려 할 가능성도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UEP 및 핵확산 의혹과 관련한 미북간 핵 협상이 올 한해 계속되면서 결국 폐기단계로의 진전은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려 있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군비통제연구실장은 ‘데일리엔케이’와의 통화에서 ▲미국 대선 및 부시 행정부의 외교적 성과 미흡 ▲북한의 대남공세 시작 등을 언급하며 “미국은 북한이 올해 핵 행보에 서두르지 않고, 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시간벌기’에 나올 것이라고 알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연구실장은 “미국이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신고를 분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면서 다만, “우라늄농축프로그램과 핵확산 의혹은 북한 비핵화의 핵심 사안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눈 감고 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국 북한과 미국은 UEP문제와 핵확산 신고문제를 두고 양자 간 협상이 올 한해 이어갈 것”이라며 “이 경우 북핵 3단계 협상으로 진전되기는 힘들어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