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좋은협의”…核신고 돌파구 찾은듯

미국과 북한이 8일 싱가포르에서 석달 넘게 지연된 핵 프로그램 신고에 대한 해법 찾기에 착수, 상당부분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8일 핵신고 해법 도출을 위한 미∙북 수석대표 회동 후 기자회담에서 “좋은 협의를 했다”면서 “얼마나 좋은 협의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이어 “제네바 회동(3∙13) 때보다 더 진전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 “오늘 나눈 얘기에 대해 본국 훈령을 받기로 했다”면서 “일이 잘 되면 베이징에서 더 많은 것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힐 차관보는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측에게 이번 회동의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다.

힐 차관보의 이 같은 언급에 따라 양측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및 시리아와의 핵협력 의혹 등 쟁점에 대한 신고 방안에 의견 일치를 본 것 아니냐는 관측이 회담장 주변에서 제기되고 있다.

앞서 김계관 부상도 회담을 마친 뒤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저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견이 상이한 부분을 많이 좁혔다”면서 “회담이 잘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부상은 이어 “이번 합의에 따라서 해야 할 행동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북 사이에 6자회담 현안을 풀기 위한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북은 플루토늄 관련 사항은 북한이 정식 신고서에 담아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고 UEP와 시리아와의 핵협력 의혹은 ‘간접시인’ 방식으로, 양측만 공유하는 비공개 양해각서를 통해 신고하는 ‘분리신고’ 방식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는 미국이 자신의 이해사항을 기술한 뒤 북한이 이를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중국이 1972년 미∙중 간에 체결된 ‘상하이 코뮤니케’를 참고해 제안한 아이디어다. 이에 따라 ‘북한이 우라늄 활동과 핵확산 활동에 개입했다는 것이 미국의 이해사항’이라고 기술하고 북한은 이런 내용을 ‘반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반박하지 않는다’는 제3자적 표현과 관련, 미국 측은 표현수위가 높은 ‘인정했다(admit)’ 등을, 북한은 ‘인식하고 있다(acknowledge)’거나 ‘이해한다(understand)’ 등의 표현을 주장하며 그 동안 신경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회담 직후 힐 차관보와 김 부상 모두 “좋은 협의였다”며 만족감을 나타낸 것으로 비춰볼 때 양측은 최대 쟁점인 UEP와 시리아 핵 커넥션 의혹 등에 대한 간접신고 방안에 절충점을 찾고 표현 등에 있어서도 상당부분 의견을 좁힌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협의 내용을 양측 정부에 보고한 뒤 추후 훈령을 받기로 해 최종 결단은 양국의 수뇌부 결단에 달려있다. 경우에 따라선 지난 ‘제네바 회동’처럼 북한이 즉답을 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외교가의 분석이다.

일단 대선을 앞둔 임기 말 부시 행정부로서는 외교적 성과가 절실한 만큼 외교력과 행정력을 유지할 수 있는 8월 이전에는 북핵 폐기 문제 논의를 끝내고자 협상을 최대한 빠르게 이끌어가려고 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최근 미 행정부 관료들도 ‘수 주 내 해결해야 한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등의 ‘시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북한도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에너지 지원 등 정치∙경제적 실익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비핵화 진전에 따른 단계별 지원’을 밝힌 남한 정부로부터의 인도적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8월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 주변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꺼려한 측면도 고려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이번 미∙북회담이 긍정적 결과로 이어져 북한의 핵신고 조치가 취해지면 중국은 곧바로 6자회담 참가국들의 의견을 수렴, 신고서 제출을 계기로 6자회담을 재개, 다음 수순으로 넘어가려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신고서에 담긴 내용의 검증과 함께 핵시설 폐기라는 비핵화 3단계를 위한 로드맵 마련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의 조치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유지원 등 에너지 설비 지원도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남북경협도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비료, 쌀 등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도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한의 ‘통미봉남’ 정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도 ‘행동 대 행동’ 원칙을 밝히며 속도조절에 나섰던 불능화 작업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핵신고 문제가 해결돼 북핵문제의 일정한 진전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점에 가면 다시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6자회담 국으로부터 핵신고의 상응조치인 중유지원 등의 에너지 지원 등의 경제적 실익을 최대한 챙기면서 시간 끌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

특히 “남한의 보수정권 길들이기에 돌입한 북한으로선 당분간 중국을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8월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이후 6자회담이 또다시 브레이크가 걸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후 협상 과정을 최대한 쪼개는 ‘살라미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핵신고에 따라 6자회담이 재개되고 관련국들의 상응조치가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3단계 북핵폐기는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

핵 신고 이후 UEP와 핵 시리아 핵협력 의혹에 대한 신고 내용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측이 갈등을 보일 경우 검증과정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경우 사실상 비핵화 3단계 북핵 폐기 로드맵 마련은 어려워진다. 6자회담도 또다시 장기간 공전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2차 북핵위기의 원인이 됐던 UEP의혹에 대한 신고가 확실치 않다는 점과 시리아 핵 협력설에 대한 북한의 신고가 미진하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 내 강경파들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저지 등의 반발도 예상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미국 강경파들의 대북 압박 조짐이 점화되면 곧바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대미 공세에 나설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부시 행정부가 임기 내 북핵 해결을 위한 모멘텀을 유지했다는 성과는 인정받겠지만 북핵 폐기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북한 역시 부시 행정부를 3단계 북핵폐기의 당사자로 여기지 않아 최종 ‘한반도 비핵화’는 차기정부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북핵 폐기 3단계 로드맵 작성도 상당한 고충이 예상된다. 지난 2003년 북한이 시인했던 기존 핵무기 등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또 북한은 경수로를 먼저 제공하지 않으면 협상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힐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6자회담이 부분적으로 재개되겠지만 북핵 폐기단계로 진전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앞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