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 불이행으로 북핵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미북 양국 6자회담 대표들이 이번 주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동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들은 10일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북한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13~14일 제네바에서 회담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핵협상 진전의 걸림돌인 핵 신고 문제를 집중 협의할 것으로 보이는 이번 회동 결과에 따라 향후 북핵문제를 비롯한 미북∙남북관계 진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동안 미국은 북한에 모든 핵무기와 물질, 시설은 물론,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핵확산 의혹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하라고 촉구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UEP 개발 의혹과 핵확산 활동을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을 상대로 ‘행동 대 행동’원칙을 강조하면서 대북 테러지원국 삭제 등의 선(先)조치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양국 간 줄다리기로 북핵 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져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면서 진전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는 분위기다.
중국은 핵 신고의 쟁점 사항인 UEP 문제와 핵확산 의혹 등에 대해 미국과 북한 양측의 입장을 나란히 병기하는 형태의 절충안을 제안했고, 이에 대해 미국은 ‘수용 가능’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그 동안 “이 달 중 핵 신고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임기 말 외교적 성과를 바라는 부시 행정부는 적어도 3월 중에는 핵 신고 방안이 타결돼야 폐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추진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11월 대선 전에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에 미국 측은 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를 비롯, 비핵화 3단계인 핵 폐기 로드맵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과 별도의 회동을 갖는 방안을 집중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달 22일 대북 중유 지원 2차분도 선적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힐 차관보는 이미 중국의 절충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중국 측에 전달했고, 북한 측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지난달 19일 베이징에 나와 힐 차관보와 만났던 김 부상은 이 같은 중재안을 가지고 귀국해 본국의 입장을 전달받은 뒤 지난 1일 베이징에서 힐과 다시 만날 계획이었지만 만남이 무산됐었다. 때문에 이번 제네바 회동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북한의 구체적인 답변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북한 측이 이번 회담에서 절충안을 받아들일 경우 한동안 열리지 못한 6자회담이 재개되고, 영변핵시설 불능화와 핵 신고,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 해제를 골자로 한 북핵 2단계 합의 이행은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2단계 합의 이행을 넘어 북핵 폐기와 미북 간 관계정상화 등을 목표로 한 3단계 협상도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제네바 회담은 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남북관계를 가늠하는 데에도 중요한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핵 외교가에서는 북한이 최근 새 정부를 ‘보수 집권세력’ ‘독재정권의 후예’라고 공격하고 있지만 이번 회동에서 북한이 결단을 내려 북핵 협상을 진전시킨다면, 남북관계도 전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북미 양측이 이번 회담에서도 북핵 신고를 둘러싼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할 경우 부시 미 행정부 임기 내 북핵문제 해결은 사실상 물 건너 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대북 적대시정책을 우선 철회할 수도 있지만 북한의 약속 이행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미국 내 여론도 이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북한이 미국과 중국이 제안한 절충안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불투명하다.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도 지난 8일 미국이 3월 중 북한의 핵신고 문제가 마무리되기를 기대하는 것에 대해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도 최근 북한을 방문한 미국의 민간 대표들에게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한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에 핵신고와 관련한 다른 제안을 내놓더라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북한이 무작정 협상을 거부할 경우 국제사회의 압력에 직면할 수 있는 만큼 정치적 효과를 고려하는 제스처는 기대할 수 있다. 핵 신고 절충안을 받아들여 경제적 이득을 취한 후 이후 3단계 협상에서 최대한 잘게 쪼개서 협상하는 ‘살라미’ 전술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미국과 북한이 핵신고에 극적인 타협점을 찾더라도 갈 길은 멀다. 3단계인 북핵폐기 협상에 진입하더라도 넘어야할 산이 첩첩산중이기 때문이다.
영변의 3개 핵시설 불능화가 완료되더라도 북한이 신고할 나머지 핵시설에 대한 불능화 및 폐기 방법을 놓고도 장기간 지루한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핵무기는 별개의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기도 하다.
김 부상도 최근 “과거의 모든 핵문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 교수는 “미국의 절충안을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이번 회동의 관건이 될 것”이라면서 “핵 신고의 쟁점인 농축 우라늄 문제와 시리아 핵 확산 의혹에 대해 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인정하고 자백해야 하는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어 “북한의 정확한 신고에 따라 3단계 북핵폐기 단계의 대상도 결정된다”면서 “만약 미국과 북한이 타결점을 찾지 못한다면 부시 행정부의 협상 모멘텀도 바뀔 것이고 협상은 차기 정부로 넘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조성렬 신안보연구실장은 “미국의 수정안을 1차 거부했던 북한이 협상에 임한다는 것을 볼 때 중국이 제안한 절충안을 받는다는 표시라고 본다”면서 “이후 북한은 ‘10∙3합의’에 따라 관련국의 중유제공과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의 ‘행동’ 이행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연구실장은 이어 “부시 행정부는 3단계 북핵폐기 로드맵을 확정하는 것까지 가능할 것이고 실질적인 해체과정은 차기 정부가 될 것”이라면서 “북한은 북핵폐기 과정에서 이슈를 최대한 쪼개면서 행동 대 행동을 요구하는 ‘살라미 전술’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