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시료채취 문건 “있다”“없다” 진실게임

미국과 북한이 북핵 ‘검증’의 핵심사안인 ‘시료채취 합의’ 여부를 두고 진실게임이 한창이다. 내달 8일 6자회담 개최설도 미국발로 제기됐지만 의장국인 중국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국제회의 참석차 방한한 성 김 국무부 대북특사는 24일 “(검증과 관련) 합의한 사항에 대해 워싱턴과 평양 간에 혼돈(confusion)은 없다”며 “이제는 미·북 양자 간의 합의와 이해사항을 6자 프로세스로 가져와 문서화하는 일이 남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미 지난 12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북핵 검증 체계와 관련, “검증방법은 현장방문, 문건 확인,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로 한정된다”면서 시료채취 거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성 김 특사의 발언은 이를 부인한 것이다.

지난달 1~3일 평양을 방문해 ‘미·북합의’를 이끌어 냈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도 최근 국회 방미단과 만나 “북한은 분명히 시료채취에 동의했다”며 “(합의 내용을) 본문이 아닌 부속문서에 써넣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북한과 본문만 공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시료채취’는 합의했지만 공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미국의 ‘시료채취 합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24일 “(합의된 문건에) 시료채취와 관련한 그 어떤 문구도 들어있지 않다”며 “서면합의 밖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곧 가택수색을 시도하는 주권침해 행위”라고 재차 반발하고 있다.

이어 “6자회담에서 시료채취 등을 포함시킨 검증문건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은 북한과 미국이 북한의 ‘특수상황에 대해 견해의 일치를 보고’ 채택한 평양합의에 대한 ‘전면거부로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미·북이 ‘시료채취 합의’를 두고 갑론을박 설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미·북간 합의를 보여주는 어떠한 문서, 음성 및 영상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워싱턴타임스가 24일 보도했다.

신문은 북한이 시료채취를 약속했다고 기술돼 있는 문서는 힐 차관보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대화록’이 유일하지만, 국무부 측은 내부문건임을 들어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진위를 가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라이스 장관은 북한의 주장을 반박할 ‘물증’이 부족하다는 점을 우려해 힐 차관보에게 김계관 부상과 나눴던 대화록을 공식적인 6자회담 문건으로 작성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북간 ‘진실게임’에 대해 한 외교 소식통은 “미·북간에 공식문서에 의한 합의사항과 이해사항이 있다”면서 “당장은 어렵지만 비핵화가 보다 진전된 뒤 샘플채취를 실시하기로 미·북간에 양해가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북이 ‘시료채취 합의’를 두고 극명한 이견차를 보이면서 ‘검증 합의서’를 논의하기 위해 재개될 6자회담도 진전된 성과를 도출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검증의 핵심사안인 ‘시료채취’ 문제에 미·북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검증’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미·일은 이번 6자회담에서 ‘시료채취’를 포함한 검증의정서가 채택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황준국 북핵 단장도 24일 “이번 6자회담에서 검증의 중요요소들이 포함된 검증의정서가 채택돼야 한다는 게 한·미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의장국인 중국은 성과를 담보할 수 없으면 6자회담을 개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라이스 국무장관의 내달 8일 6자회담 개최설에 대해서도 “미국의 희망”이라며 6자회담 개최 일시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다.

북한도 임기 만료를 앞둔 부시 행정부와 6자회담을 계속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북한은 미국의 ‘시료채취 합의’ 주장에 대해서도 불능화에 따른 경제적 보상이 늦춰지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도 “일부 세력이 시료채취 문제를 들고 나오는 데는 6자회담 자체를 지연시켜 저들의 경제보상 의무를 태공(태만)하고 의무이행이 처진 것을 합리화해 보려는 데 그 속심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6자회담이 재개된다고 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북핵 비핵화 2단계를 마무리 짓기 위한 ‘검증’ 회담이 되겠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