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수교?…김정일 제작 ‘환타지 영화’

▲ 미북 관계정상화 실무회담을 통해 뉴욕을 방문한 김계관 北 외무성 부상 ⓒ연합

김정일은 전략적이라기보다 전술적 유형의 인간이다.

눈앞에 놓인 난관을 돌파하고 이익을 챙기는 전술과 단기승부에 매우 강하다. 94년 제네바 합의와 최근 2.13 베이징 합의는 김정일의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준 사례다. 김정일은 지난해 11월 미 공화당 중간선거 패배-이라크 사태와 이란 핵문제의 틈새를 뚫고 미국과 베를린 양자대화를 끝내 성공시켜 2.13 베이징 합의를 이끌어냈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부 부장관을 지낸 아미티지는 “김정일은 약한 패를 쥐고도 끝까지 이익을 챙기는 영리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김정일은 영리하며 이해타산에 밝고 교활하며 순발력이 있다. 2005년 9.19 공동성명 후 불법금융 문제가 불거지자 1년 여 동안 회담을 거부하다 핵실험 강공으로 국면을 바꾸었다.

사실 북한 핵문제와 BDA 불법금융 문제는 서로 아무 관계없는 별개의 사안이다. 김정일은 아무 관계도 없는 두 가지 사안을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며, 결과적으로 한데 묶어놓는 데 성공했다.

3월 들어서는 미북관계 정상화에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동북아의 정세변화는 향후 미-북, 남-북이 얽히면서 또 한번 ‘한반도 평화 쇼’를 불러일으킬 모양새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9일 귀국하는 길에 중국에 들러 “북미간에 현안을 해결하고 관계정상화를 하기로 했으며 BDA 문제도 미국이 다 풀어주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동북아 정세에 미북관계 정상화가 최대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이 평화무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짧게 잡아도 영변 핵시설 폐쇄-HEU를 포함한 핵프로그램 신고·협의-핵시설 불능화 기간까지는 평화무드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5개 워킹 그룹 논의진전을 포함하여 남한의 대북지원, 각종 남북회담과 공동행사, 남북정상회담 추진 등으로 한반도의 평화무드는 갈수록 고조되어 갈 것이다. 이 분위기는 상황에 따라 12월 대통령 선거까지 이어질 수 있다. 김정일의 2.13 계산법에 남한 대통령 선거도 시야에 넣은 것은 분명하다.

김정일, 전략적 결단 못내려

그러나 김정일은 큰 틀에서 국가와 인민을 어떻게 경영할 것이냐라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김정일이 전략적 유형의 인간이라면 79년 중국이 개혁개방의 큰 걸음으로 나갈 때, 또는 90년대초 동유럽이 체제전환을 할 때 북한도 개혁개방의 전략적 설계를 했어야 맞다. 북한의 배후에는 언제나 중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온 만큼, 만약 김정일이 전략적 선택을 한다면 중국으로부터 개혁개방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개혁개방 설계도를 그리지 않은 상태다. 북한내 시장이 확대된 것은 지난 10여년을 거치며 주민들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개척한 것이다. 국가가 개혁개방 설계도에 따라 능동적, 주동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독재정권 유지 차원에서 선군(先軍)을 강화하고 통제체제를 죄었다 풀었다 하며 현실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중국,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으로 가려면 먼저 김정일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이는 수령체제에서 필요조건이자 동시에 충분조건이다. 만약 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면 김정일은 굳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없이도 중국을 주요 스폰서로 하여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다. 물론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 베트남의 경우처럼 북한이 미국과 전면적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면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 마련된다. 만약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 수교하여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이는 크게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김정일이 그런 수순을 밟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13 이후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는 2000년 시기와 비교해서 유사한 면이 있고 다른 면도 있다.

당시 김정일은 중국, 한국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그해 10월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이 미국을 방문했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 김정일을 만났다. 또 클린턴 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김정일이 미국을 방문하도록 초청장도 보냈다고 한다. 클린턴의 방북도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클린턴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클린턴의 방북도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클린턴의 방북요청을 김정일이 왜 거절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추론컨대, 김정일이 방미한다는 것은 미북간 적대관계의 청산, 미국과의 수교교섭, 한반도 평화체제 추진이라는 의미가 있고, 현실적으로는 미국이 요구한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시로선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라고 김정일이 판단했을 수 있다. 또 당시 미국은 대통령 선거 막바지였다. 김정일은 여러가지 조건과 상황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김정일이 미국에 가는 ‘행위의 상징성’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김정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자유진영 국가를 방문한 적이 없다.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도 방문한 적이 없다.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주인공은 김일성이었고, 당시 인도네시아는 이른바 ‘블럭 불가담’ 주장을 편 핵심국가였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후 30여년 동안 김정일이 방문한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김정일 만큼 지독한 수구냉전적 사고를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김정일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자유진영의 본산과 손을 잡는다는 의미다. 또 ‘이제부터 나, 김정일은 개혁개방으로 간다’는 의미도 투영된다. 이것은 수령독재를 하고 있는 김정일로서는 ‘자기존재 부정’과 비슷하다. 물론 김정일이 미국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미북 수교교섭은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치 행위가 필요하다. 하지만 2000년에 이 ‘환타지'(fantasy)는 이뤄지지 않았다. 김정일이 클린턴의 초청을 거부한 것도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김정일이 원하는 5가지

최근 미북간의 급속한 해빙 무드를 보면서 김정일이 핵무기를 보유한 조건에서, 즉 핵보유국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미국과 수교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2000년과 2007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2000년 당시에는 미사일 협상이 핵심쟁점이었지만 북한은 이제 핵실험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핵보유국의 지위에서 미국과 수교하면 남한은 군사, 외교적 고립이 불가피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다. 물론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미북 수교는 김정일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미국과의 수교는 김정일로서는 정말 따먹고 싶은 ‘사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수령체제를 지킬 수 있고, 핵무기도 보유하고,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군사동맹까지 파기시키고 미국과 수교할 수 있다면 김정일로서는 환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써 과연 가능할까.

북한 현대사 60년에서 ‘반미투쟁’은 정권의 중요한 존립기반 중 하나였다. 북한은 ‘반미’로 주민들을 세뇌시켜 각종 군중동원 투쟁을 벌이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유지해왔다. 반미투쟁은 계급투쟁-계급독재-수령독재의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만약 김정일이 미국과 수교한다면 50년 이상 지속돼온 이 구조를 무너뜨리겠다는 뜻이다. 미국과 수교하면 이어지는 개혁개방 물결과 어떤 형태로든 수령체제의 와해를 김정일은 각오해야 한다. 수령체제의 해체는 ‘김씨왕조’의 종말을 의미한다. 김씨왕조와 북한사회를 떼어놓고 과연 상상이 가능한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김정일에게 미국과의 수교가 더 중요한가, 독재정권 유지가 더 중요한가? 독재정권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2.13 이후 미-북 간에 이뤄지고 있는 해빙무드의 이 ‘엄연한 현실’은 무엇인가. 그 답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지금 김정일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따지면 된다.

현재 김정일에게 절실한 것은 BDA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제, 달러, 식량, 에너지, 남한 대선국면을 겨냥한 한반도 평화무드 조성이다. 김정일은 이 문제를 풀어가고 싶은 것이다.

김정일은 미북간의 해빙무드를 이용하여 1)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무력화하고 2)’한반도 평화무드 조성’이라는 대남 정치선전전을 벌이며 3)남한의 각종 지원을 듬뿍 받아내고-올해 남한의 대북지원은 거의 ‘아낌없이 주는 젖소’ 수준이 될 것이다- 4)미국과의 대화로 일본을 압박하여 식민지 배상금 논의를 부활시키며 5)중국의 변함없는 지원을 받아내는 것이다.

미북관계 정상화 대화는 이상 다섯 가지를 풀어가는 첫 고리에 해당하며, 또 가장 결정적인 고리다. 나머지는 대체로 여기에 종속적이다. 2.13 합의문의 구조도 미북관계 정상화 등 5개 워킹 그룹 가동과 BDA 해제가 30일 내로 먼저 되어있고, 북한 핵문제는 60일 내로 그 뒤부터 풀어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김정일은 우선 미국과의 대화에 속도전을 벌이며 대형 정치 선전전부터 시작하려는 것이다.

‘미북관계 정상화’ 정보 북한내부로 역공 필요

그렇다면 ‘미북 수교’는? 그것은 환타지다. 정치 선전전에서 환타지 조성은 맨먼저 해야할 일이다. 대중은 이 환타지를 바라보며 따라가게 된다. 김정일은 선전선동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선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김정일은 미북 수교라는 ‘환타지 영화’를 먼저 틀어놓고 관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관객은 동북아의 대중들이다. 그중에서도 남한 관객들이 이 영화에 빠져들기 쉽다. 그래서 남한이 관람비용(대북지원)을 가장 많이 내야 한다. 일본은 환영하기도, 반대하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자세에서 미북간의 대화 결과에 따라 떠밀려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볼 수 없는 관객들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다. 만약 북한 주민들이 이 영화관람에 동참하게 되면 불리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김정일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조-미 수교’는 충격적인 일이다. 이미 외부 정보가 일정 수준 유입된 상태에서 ‘조-미 수교’ 소식은 주민들의 심리적 동요와 개혁개방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2.13 합의 후 북한 선전매체가 핵시설 폐쇄를 ‘임시 가동중단’으로 발표한다든지, 뉴욕에서의 미북 대화를 일체 보도하지 않는다든지, 외국에 나가있는 외교관 자녀들에게 전원 귀국령을 내렸다는 소식은, 북한주민들은 이 ‘영화’를 봐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또 김정일은 “조-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겠지만 개혁개방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식의 지시를 내부적으로 하달했거나, 곧 하달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김정일로서는 소정의 성과-각종 대북제재 해제, 경제지원, 한반도평화체제 논의 등 평화무드 조성-를 거둔 다음에는 특정 국가에 잘못을 덮어씌우면서 이 영화를 종영해야 한다. 자칫 장기상영에 들어갔다가 미북 수교회담 진행이 기정사실화 되면 주민들로부터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김정일이 진정으로 미북수교-개혁개방으로 가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그런데도 미북 수교라는 한마디에 모두 흥분하고 있다. 김정일의 주특기인 단기 전술과 선전이 이번에도 남한관객들에게 잘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계관 부상이 “워싱턴-평양 연락사무소 설치를 건너뛰어 바로 수교교섭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언급은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연락사무소 설치는 정식수교 이전의 단계지만 실제로 수교로 갈 수 있는 물질적 증거가 된다. 또 연락사무소만 설치되어도 평양에 성조기가 게양된다. 북한당국이 이마저도 못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양의 성조기는 주민들에게 충격과 동시에 개방의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 아울러 미북간 갈등이 생겨도 수교를 앞둔 연락사무소 단계에서 대형 반미집회를 가지거나 성조기를 불태우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부상의 발언도 ‘선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따라서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미국과 수교한다면 큰일’이라는 식의 수세적 두려움을 지금 단계에서는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조미 수교’와 ‘북한 개혁개방’이라는 역정보를 최대한 북한 내부로 들어가게 하는 전술적 공격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 민간 대북방송은 북한주민을 상대로 조선중앙방송이 할 수 없는 사실보도를 적극적으로 ‘대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전술적 공격은 민-관이 체계적 역할 분담 하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문제는 현 정권이 이에 대한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올 한해동안 김정일이 틀어놓은 ‘미북수교 환타지 영화’ 제작비는 남한이 대고, 오히려 김정일의 정치선전에 노출될 가능성만 높아진 것이다.

결국 이 잘못된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담당자는 국민들이다. 올해는 반드시 이 구조를 깨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