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국 배치를 놓고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역시 논란이 됐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는 한국이 가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사드의 한국 배치 문제를 놓고는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지 의견이 분분하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 혹자는 지금의 정세가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중국 외교부의 류젠차오 부장조리(차관보급)가 한국에 온 16일 “(사드의 한국 배치와 관련해) 중국의 관심을 중시해달라”고 하자, 중국이 한국 땅에서 공개적으로 사드 반대를 밝힌 데 대해 온 나라가 떠들썩해졌다. 다음날인 17일 이번에는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나섰다. “제3국이 아직 배치되지도 않은 안보시스템에 대해 강한 표현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중국을 겨냥해 비판했다. 우리 국방부가 17일 “주변국이 우리의 국방안보 정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입장을 표명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미국과 중국의 주요인사가 한국을 찾을 때마다 온통 관심은 사드 문제에 대해 이들이 어떤 언급을 하느냐에 모아지고 있다.
피동적인 객체로 인식되고 있는 ‘한국’
그런데, 이러한 논란 속에 지극히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이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피동적인 객체’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드와 관련된 논란에서 ‘한국’은 능동적으로 의사를 결정해가는 ‘주체’가 아니라, 주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의사결정을 강요받는 ‘피동적인 객체’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형성시키는데 언론, 그것도 한국 언론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SBS의 외교안보 기사를 담당하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언론이 이렇게 ‘한국’을 피동적인 객체로 묘사하는 데는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에 대한 관성이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에 위치한 반도적 특성으로 인해 한반도는 고구려 때처럼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시기가 아니라면 주변국의 영향에 휘둘리는 역사를 경험해왔다. 지금도 한반도 주변의 미중일러가 모두 우리보다는 국력이 센 상태에서, 우리가 주변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한국’을 피동적 객체로 인식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관성 이외에도 언론들의 과당경쟁에 따른 필요 이상의 이슈화, 여기에 기름을 붓는 듯한 정치권에서의 ‘사드 공론화 논란’ 등이 지금의 한국을 미중 사이에서 당장이라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 ‘객체’로 만들고 있다. 외교안보와 같은 전문적인 사안은 공론의 장에서 비전문가들이 백가쟁명식으로 결정할 것이 아닌 고도의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사안인데도, 지금의 우리 상황은 과열화된 공론이 정부의 결정을 압박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택지를 좁혀가고 있는 형국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 …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냉전 시기 ‘한국’의 안보전략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냉전체제 하에서 우리가 살 길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에 편입되는 길 뿐이었다.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돼왔지만, 그렇다고 한미관계 이외의 안보전략을 고민할 수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탈냉전 이후 G2로 부상한 중국과 경제적 관계가 깊어지면서 우리가 예전처럼 미국에만 몰입할 수는 없게 됐다. 해양세력인 일본은 어차피 미국에 몰입하는 것이 이해관계에 부합하겠지만, 대륙과 해양의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을 갖고 있는 한국은 해양세력에만 몰입할 수 없다. 한미관계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한미관계를 위해 한중관계를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우리가 미중과의 관계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를 ‘샌드위치’ 신세라고 스스로 폄하하기보다는 ‘능동적인 행동주체’라는 시각으로 적극적으로 사고를 바꿀 필요가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미중의 사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 지정학이 우리에게 준 숙명이라면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미중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높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제 ‘피동적 객체’로 익숙했던 역사적 관성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적어도 주변국의 말 한마디에 우리 스스로 과열돼 내부적으로 자중지란에 빠지는 모습은 보이지 말았으면 한다. 주요 전략적 현안에 대해 때로는 모호성도 필요한데, 주변국이 우리 패를 다 알도록 우리가 스스로 정부를 압박하는 어리석은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 국민들에게 정책에 대한 ‘신뢰’ 줘야
마지막으로, 정부의 책임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분히 진행돼야 할 외교안보 현안 논의가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말 한반도의 주요현안에 대해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 지 언론도 국민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비전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데도 언론과 국민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소통이 부족한 것이다. 정부의 전략을 다 공개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언론과의 소통을 통해서라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믿음을 줘야 우리 사회의 공론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정부가 언론, 국민과 함께 간다는 마인드를 가지지 않는 한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정부에게 돌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