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時납치’는 김일성이 치밀하게 계획한 범죄”

▲ 6.25전쟁 납북길 따라 걷기 행사 ⓒ데일리NK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9월까지 불과 3개월 사이 남한 내 국회의원, 법조인, 행정공무원 등 지식인 계층 8만 여명이 북한군에 납치됐다.

영문도 모른 채 북한으로 끌려가야 했던 10만 여명의 납북자들.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고 56년의 세월을 모진 운명 탓로 감내해야했던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전시 납북자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제 어떻게 몇명이 납치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

납북자 가족들은 정부를 믿고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발 벗고 나서는 쪽을 택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 산하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과 강릉대 김명호 경영학과 교수는 13일 6.25전쟁 납북자 실태의 실증적 분석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전쟁 발발 후 3개월간 전국의 지식인 계층이 계획적으로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해냈다. 이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자행된 명백히 계획된 범죄행위라는 점을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결론 부분에서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작업’의 일환으로, 6.25 전쟁 당시 납치자 문제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또한 그동안 실추된 납북자들의 명예를 복원시키고, 유가족들의 바램인 납북자들의 생사확인을 앞장서 줄 것”을 촉구했다.

40 페이지 분량으로 된 보고서는 전시 납북자 현황과 발생 배경, 그 결과에 대해 내밀한 분석을 담고있다.

1. 6.25전쟁 당시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는 몇 명인가?

6․25전쟁 납북자 실태분석을 위해 공보처 통계국 작성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2,438명), 대한민국 정부 발행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82,959명), 해공 신익희 선생 유품에서 나온 『6․25사변 피랍인사 명부』(2,316명), 1956년 대한적십자사의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7,034명),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의 『피납치자 명부』(17,940명) 등 5개 문서에 등재된 명단을 토대로 했다.

3개월에 걸친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5개 문서에 등재된 112,687명 가운데 중복된 명단을 제외하고 총 96,013명의 납북자 명단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는 1,842명(1.9%)의 여성들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에 비하여 납치 여성의 숫자가 매우 적지만 김일성의 납치 행각에 여성이 2천명 가까이 포함된 것은 적지않은 충격을 던져준다.

연령대 별로는 당시 나이을 기준으로 10대가 20,785명(21.6%), 20대가 51,436명(53.6%), 30대가 14,773명(15.4%)으로, 10~20대의 납치가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338명의 10세 이하의 영아 및 어린이들도 납북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영아들은 대부분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납북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60세 이상의 고령자들도 746명이 포함됐다. 6.25전쟁 당시 납북자 현황

 

 

서울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합계

남자

21,760

18,024

11,350

23,303

9,387

10,114

93,938

여자

575

246

25

361

116

519

1,842

미기재

13

0

0

0

0

220

233

합계

22,348

18,270

11,375

23,664

9,503

10,853

96,013

 

2. 납치는 주로 어느 지역에서 이뤄졌나?

납북자 중 상당수가 (40,618명, 42.3%)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11,375명, 11.8%)는 인구수에 비하여 납북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북한과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보고서는 주장했다.

3. 납치는 주로 언제, 어디서 이뤄졌나?

전시 납북자들은 ‘1950년 7월’부터 ‘1950년 9월’ 사이의 3개월에 걸쳐 납북자들의 88.2%(84,659명)가 집중적으로 납북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한 다음 달부터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계획적인 납치작전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또한, 북한군들이 납북자들의 개인별 인적사항을 사전에 알고 직접 찾아와 납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납치장소가 납북자들의 ‘자택’(72.1%)이나 ‘자택 근처’(8.2%)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전체의 80.3%로 나타났다. 이는 북한의 납치 행위가 북한의 의도적인 행태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시, 경기도, 충청도에서 대규모 납치가 일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4. 북한은 어떤 사람들을 납치했나?

납북자들의 직업별 분류도 다양하다. 국회의원(63명), 판검사(90명), 변호사(100명), 경찰(1,613명), 행정공무원(2,919명), 군인 및 군속(879명), 교수 및 교원(863명), 의사 및 약사(526명)가 포함돼있다.

납북자 중 농업 종사자가 전체의 60.8%에 달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산업구조가 농업에 편중된 조건을 고려하면 다른 직업에 비하여 결코 많은 비율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농촌지역 납북자들은 해당 지역의 이장들로 나타났다.

5. 북한이 대규모로 지식인 계층을 납치해 간 이유는?

1946년 김일성은 담화문을 발표, “부족한 인테리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라고 발표했다.

북한의 이러한 납치행위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상태에서 북한으로 끌려간 납북자들은 지금까지 억류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자진 월북자들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납북자 가족들은 가장이 북으로 납치된 가정적인 결손의 고통 뿐만 아니라 용공분자의 취급을 받아 이중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6.25 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북한의 납치 만행이 연구 논문을 통해 객관적인 자료로 발간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면서 “이 자료를 근거로 북측에 납북자 송환 요구를 강하게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