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전 동독은 체제 선전과 정보 독점으로 주민들을 옭아매려고 했지만, 자유세계 정보에 대한 동독 주민들의 목마름은 끊임없이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동독 주민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 서독 방송을 접하며,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동독과 달리 나날이 풍요로워지는 서독의 현실을 인지한 동독 주민들은 이내 동독 정권이 자신들을 기만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들은 급기야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민주화와 국경 개방, 그리고 동서독 통일을 요구하게 된다.
동서독 분단과 통일을 직접 경험한 독일 전문가들은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주요 ‘촉진제’가 될 것이라 평가했다. 때문에 현재 북한 주민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대북라디오 방송을 북한 주민들의 인식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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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獨 방송, 동독 주민 사고 변화 이끌어= 동독 주민들이 자국 체제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건 서독 라디오 방송을 통해 동서독의 현실을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동독 정권은 주민들에게 “서독은 마약과 실업의 온상”이라고 비난하며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했으나, 동독 주민들이 서독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접한 서독은 이와는 정반대로 풍요로운 생활과 자유로운 발언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위르겐 리히케(Jürgen Reiche)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관장은 “독재체제가 마치 주민들을 완전히 세뇌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정보가 유입되는 즉시 주민들은 사고의 균열을 겪게 된다”면서 “동독 주민들은 정권의 세뇌에 의해 서독에서의 삶은 엉망일 거라 믿고 있었으나, 반대로 서독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게 전부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독 출신인 헤르베르트 바그너(Herbert Wagner) 前 드레스덴 시장(現 드레스덴 슈타지 박물관장)도 “군 복무 시절 나와 동료들은 동독 탈출 현상을 막기 위해 국경 지역에서 주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어야 했다”면서 “하지만 그 때마저도 나는 동료 군인들과 ‘코스모스’라는 소형 라디오로 서독 방송을 몰래 들었고, 그러면서 ‘주민들을 절대 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동독 주민들이 동독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서독 방송을 통해 동독 정권이 은폐해 온 자국의 현실을 목격하면서부터다. 여기엔 1980년대 동서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동독 민주화 운동가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독 내 운동가들은 자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와 반(反)체제 시위를 비디오로 촬영해 서독으로 넘겼고, 서독 내 동독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를 서독 라디오 및 TV 방송으로 제작하는 데 협조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동독 주민들은 비로소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동독 정권의 우월성이 모두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1983년 민주화 운동 혐의로 동독서 추방돼 서독에서 동독 민주화 운동을 진행했던 롤란트 얀(Roland Jahn) 現 슈타지 문서보관소장은 “동독 정권은 체제에 불리한 사건은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오로지 서독 방송을 통해서만 자국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나 정권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서독 방송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동독 주민들은 자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얀 소장은 “특히 1988년부터 1989년 사이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시위 장면을 촬영해 방송으로 만들어 동독으로 송출하자, 곧이어 동독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면서 “통일 이후 동독 출신 사람들이 ‘내게 시위를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준 게 바로 서독 방송이 보여준 라이프치히의 시위 장면이었다”고 증언했다“고 덧붙였다.
리히케 관장도 “당시 동독에는 반(反) 체제 인사들이 점처럼 분포돼 있었으나, 모든 통신 수단에 도청의 위험이 있었던 터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큰 제약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동독 상황을 상세히 보도해준 서독 방송을 통해 이들은 각 지역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됐고, 이로써 서로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대규모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 對北라디오 방송, 北주민 계몽 이끌 유일한 수단=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현 한반도 상황에서 충분히 벤치마킹 할 만하다는 것이 독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만 당시의 동독보다 지금의 북한이 훨씬 ‘엄혹한’ 상황인 만큼 북한에 외부 정보를 유입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했다. 그나마 동독에서는 비밀리에 서독 TV도 볼 수 있었고 서독과 일정 정도 우편 및 인적 교류가 가능했던 반면, 지금의 북한은 대북라디오 방송 외에는 외부 정보를 유입시킬 방도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대북라디오 방송 강화에 보다 주력하고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독일연방공보처 측 관계자는 “그나마 동독 주민들은 분단되기 전까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어렴풋이나마 경험해봤기 때문에, 독재 체제 아래에서도 자신들에게 무엇이 결여돼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면서 “북한 주민들은 동독 주민들과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던 만큼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삶에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알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로버트 레베게른(Robert Lebegern) 뫼들라로이트(Mödlareuth) 국경박물관장도 “북한에서 검열이 워낙 심해 다양한 방법으로 정보를 유입시킬 수 없다면, 지금 하고 있는 대북라디오 방송을 북한에서 더욱 뚜렷이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면서 “라디오와 같은 수신 기계들을 북한으로 많이 들여보내거나, 중파 및 위성을 이용해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는 방법도 마련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 대북라디오 방송이 북한 정권을 자극시키기만 할 것이라고 평가하며 반대하는 것에 대해 독일 전문가들은 “대북라디오 방송은 정치적 관점이 아닌 인도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일갈했다. 동서독 분단 당시 서독에서도 방송이 오히려 냉전 상태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서독 방송을 통해 동독 주민들은 스스로 현실을 깨닫고 체제 변화까지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페트릭 가버(Patrick Garber) 現 도이칠란드라디오(Deutschlandradio) 책임자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정보와 연대의식을 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더욱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면서 “그 일을 대북라디오 방송이 인도적 차원에서 하고 있다는 게 더 많이 알려지면 좌·우파 간 갈등도 불식되고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리아스(RIAS) 기자 출신인 가버 책임자는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리아스 로고가 박힌 차를 타고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에 취재를 갔는데, 리아스 로고를 본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동안 우리를 잊지 않고 방송을 해줘서 정말 고맙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창이 돼 줬다’라는 말을 전했다”면서 “지금 대북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통일 이후 북한 주민들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을 것”고 덧붙였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