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김일성 4군단 탱크부대 순안비행장에 출동했지만…

드디어 1956년 8월 30일 김일성은 당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본 안건은 두 가지로 하나는 김일성을 위시로 한 정부 대표단의 외국방문에 대한 보고와 인민보건사업의 개선 강화를 위한 문제를 토론하기로 돼 있었다.

회의가 시작돼 김일성의 보고가 끝나자 윤공흠이 먼저 일어나 의제와 관계없는 중공업 우선노선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및 당내에서 독재행위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일성 지지파들이 윤공흠의 발언을 중지시켰으나 서휘, 최창익 등이 일어나 윤공흠의 입장을 지지하는 토론을 진행했다. 그러나 당 조직부장 김금철과 당 선전선동부 김도만 부부장 등 김일성 지지세력들이 일어나 이들의 행위를 종파로 규정해 비판했다.

술렁거리던 회의장 분위기가 체제 전복세력에게 불리해지자 연안파와 손잡기로 했던 소련파는 침묵을 지켰다. 전원회의에서 종파 행위로 몰린 연안파는 결국 반당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숙청의 대상이 됐다.

결국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는 출당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은 당직을 박탈당하고 정부 요직에서도 쫓겨났다. 소련파들은 비록 전원회의에서 직접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반 김일성 세력의 움직임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대부분 제거해 버렸다.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 김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사하여 종파가담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리고 종파분자들을 숙청한다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두 철직과 동시에 오지로 추방해버렸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평양시 외곽에 위치한 제4군단 소속 탱크부대에서 근무하다 ‘종파분자’로 몰려 일생을 양강도 삼수에서 묻혀 살았던 안영선(가명) 씨가 바로 이러한 실례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안 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1956년 7월 중순경 갑자기 대대지휘부에 사단 정치위원이 내려왔다. 정치위원은 비상소집을 일으켜 부대 전체를 모아놓고 ‘적’들과 통하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조국을 수호하자고 연설을 했다. 연설을 끝낸 이 정치위원은 부대에서 순안비행장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맨 선두 탱크에 직접 타고 순안비행장으로 향했다.

탱크들이 순안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맞이한 것은 바리케이트와 탱크들을 겨눈 직사포, 그리고 이들을 압도하는 화력을 갖춘 군대였다. 바리케이트 앞에서 멈추고 탱크에서 내린 정치위원이 이들에게 다가가자 박금철 부수상이 나와 ‘적들의 반란이 저지되었고 조국의 위험이 없어졌다’며 빠른 시간 내에 부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군단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내려온 이 정치위원은 박금철의 설득에 넘어가 군대를 부대로 철수시켰다. 그날 밤 전 부대원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갑자기 수많은 군인들이 부대를 포위하고 전 부대를 집합시켰다. 명령에 따라 모인 병사들에게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책동에 따라 움직였다는 비판이 이뤄지고 대대원 전원의 견장을 뜯고 부대 해산을 공포했다.

이날 순안비행장에는 외국 방문에서 돌아오는 김일성과 정부 대표단이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 김일성파들의 쿠테타 소식을 이미 알아챈 김일성 지지세력이 외국에서 돌아오는 김일성이 탄 비행기를 순안비행장이 아니라 순천비행장으로 착륙하게 했다. .

결국 부대장의 지시로 순안비행장으로 출동했던 수많은 군인들은 종파사건연루자로 몰려 군복을 벗고 평양시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1년 반 만에 해산되었다. 안 씨는 “강제노동이 끝난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지 못하고 깊은 산골인 양강도 삼수에 추방되었다”며 “아무 잘못도 없이 일생을 종파사건연루자라는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말했다.

이 당시 황해도에서도 최 씨 이름을 가진 한 보안원도 종파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는 전쟁시기부터 적의 정탐행위를 발각해내고 업무처리에도 능해 상급자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당시 이를 곱지 않게 여긴 있던 보안서장이 8월 종파사건을 빌미로 종파라는 누명을 씌워 최 씨를 감금했다.

감금된 최 씨는 자신이 왜 감금되었는지도 모른 채 종파라는 누명을 쓰고 20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의 두 아들은 ‘종파분자 아버지’를 둔 덕에 학교나 마을에서 주변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탄광에서 몸을 움츠리고 살았다.

20년 지난 1970년대 말에야 비로소 당시의 사건이 해명되면서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의 자식들도 그 때야 비로서 종파분자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게 되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도 8월 종파사건 이후에 조직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이 사건에 관계했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 심문하고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에 부심했던 정권 세력은 58년 말 북한국가안전보위부가 운영하던 평안남도 북창군에 위치한 득장광산(현재 18호관리소로 불리움)에 이들을 수용했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1987년에 출판한 ‘조선통사’에서는 당시 사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여러 종파의 잔여분자들이 계획하여 연합된 종파도당”이라며 “외부세력을 등에 업고 나선 사대주의자들, 혁명의 변절자들인 수정주의자들의 집단이며 단순한 종파가 아니라 반혁명도당이다”고 썼다. 그러면서 ‘8월 종파투쟁’은 반종파투쟁인 동시에 반 사대주의, 반 수정주의, 반혁명과의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오늘까지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확고한 유일지도 체제를 확립하고 주민들의 사상까지 지배하며 장기집권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유일지배체제의 역사는 오늘날 북한이 기아가 만연하고 인권이 실종된 살아있는 지옥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북한 주민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김일성-김정일에 충성하는 삶만을 허락 받으며 살고 있다.

이후 1967년 5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진행된 갑산파 제거 사건 후 대규모 권력 투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의 조기 사망과 후계체제의 미완성, 식량 안보 위기 등 북한 체제의 구조적 불안정성, 북한 주민들의 자유화 바람이 모아지면 8월 종파사건과 같은 권력투쟁이 재연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당시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권위가 유지되고 김일성 세력이 당과 군의 요직을 독점하며 강한 충성심으로 묶여있었고, 북한 주민들의 조선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유일지배체제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권력 전복 시도가 일어난다면 북한은 급속한 혼란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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