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황석영-北 홍석중 씨 공동 창작한다

남과 북의 대표적 소설가가 굳게 손을 잡았다. ‘심청’의 작가 황석영씨와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씨가 공동 창작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지난 20일부터 25일까지, 해방 이후 60년만에 처음으로 남과 북, 해외 작가들이 평양에서 만난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서 조우한 남과 북의 대표적 작가 두 사람은 “서간문이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장르에 구애받지 말고 둘이 함께 글을 쓰자”고 약속했다.

1989년 황석영 씨가 방북했을 당시 만난 이래 지금까지 유지돼온 남과 북 두 작가의 ‘우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황씨에 따르면 “홍석중 씨를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서로 가슴이 열렸다”라고 말했다.

21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2001년 평양 8.15범민족대회서 만난지 4년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오랜 만에 만난 형제 혹은 친구처럼 보였다.

나이는 홍석중 씨가 두 살 위지만, 문단 데뷔는 황석영 씨가 빨라 ‘서열’을 조정하기가 애매했다. 하지만 홍씨가 할아버지 벽초 홍명희(‘임꺽정’의 작가)의 일화를 들며 즉석에서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고 한다.

벽초는 여덟 살 때, 함께 살던 예순 살 노비(청지기)가 자신에게 말을 높이는 것을 불합리아게 생각해, 노비로 하여금 말을 놓게 했다며 황씨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평양 고려호텔 소극장에서 만났다. 이날 오후, 남과 북 그리고 해외 작가들이 모여 이틀 뒤인 23일 새벽 백두산에서 열리는 ‘통일문학의 새벽’의 주제와 프로그램 등을 사전에 합의하고 연습하는 자리였다.

황석영씨와 홍석중씨는 남과 북, 해외 작가들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 무릎을 맞대고 ‘합동 공연’을 준비하는 틈틈이 서로의 근황과 최근의 문학적 관심사, 통일문학에 대한 전망 등을 주고 받았다.

다음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황석영 = 나는 벽초 선생의 ‘임꺽정’을 1950년대 누나들이 빌려온 책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자랐다. 1970년대 구로공단 전자산업회사에 들어가 낮에 고된 일을 하고 나서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꺽정’을 손에 잡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임꺽정’을 세 번 탐독했다. 내 고향이 이북이고 외가가 평양이어서 떠돌이로 산 데다가 늘 도시에서 생활한 탓에 토착민 정서나 언어와 거리가 있었다.

벽초 선생의 문체에서 우리 말의 정체성을 공부했다. ‘장길산’을 집필하는 10년 동안 많은 공부를 했지만, 벽초 선생이 없었다면 ‘장길산’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임꺽정’은 식민지 시기 근대문학의 거봉이었고, 그 영향 아래서 민족문학의 토대가 이뤄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1980년대 남쪽에서 북한 바로 알기 움직임이 일어날 때, 홍석중의 ‘높새바람’을 읽었다. 특히 벽초의 친손자가 쓴 작품이어서 호기심이 일었고, 언젠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나는 요즘 런던에 나가 있는데, 나 자신과 한반도 문제를 세계사적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 나는 세계시민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토대는 역시 이 땅의 흔적, 전통 위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찾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서울에서 르 클레지오를 만났는데, 그가 자신의 부모는 아프리카인과 프랑스인이고, 아프리카에서 주로 성장해 조국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모국어인 프랑스어가 내 조국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크게 동감했다.

나는 분단된 조국의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은 세계 시민이지만 나 역시 내 조국은 내 모국어이다.

런던에서 홍석중 씨가 남쪽의 출판사 창비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통쾌했다.

그것은 문학의 힘이 분단의 높은 벽을 뚫은 일대 사변(사건)이었다. 만해문학상 수상작 ‘황진이’를 보면서 우리 둘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생각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민초, 민중, 백성의 삶 속에 면면히 흐르는 뜻을 놓치지 않았다는 데서 감명을 받았다.

그 사이 더 풍부하고 능숙해진 우리 언어를 만날 수 있었고, 거침없는 남녀간 감정 묘사도 돋보였다. 특히 황진의 독백 부분에서 구사된 아름다운 우리말이 근사했다. 런던에서 심사위원과 상을 주관한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근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홍석중 = ‘황진이’를 내고, 또 이렇게 황형을 만나 소감을 듣고 새삼 깨달을 것이 있다. 어제 평양에서 열린 민족작가회의가 바로 그런 것이지만 우리는 절대 분리해서 살지 못한다.

‘임꺽정’이 ‘장길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높새바람’은 ‘임꺽정’의 속편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장길산’의 제일 애독자이다.

나만큼 ‘장길산’을 많이 읽은 독자도 없을 것이다. 머리맡에 늘 꽂아두고 순서없이 꺼내 읽는다. 어설픈데도 있지만 매번 감탄한다.

그런데 ‘장길산’과 내 소설이 어딘가 모르게 닮은 데가 있다. 그러니까 서로 보완하는 거야. 우리 문학의 뿌리는 같은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쓴 ‘임꺽정’은 할아버지 당신도 인정했지만 하층 생활을 잘 그리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하층민의 생활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하층민 생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장길산’을 통해 광대를 배웠다.

▲황석영 = 홍선생께서 ‘황진이’를 쓸 때 나는 심청을 통해 자본주의가 유입되는 시기를 쓰고 있었다. 그 시기는 퇴폐적이었다. 심청은 그런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은 생명력이었다.

그런데 소설 뒷부분에서 중언부언한 대목을 추려내려고 한다. 자료가 너무 많아 자료에 치였다.

▲홍석중 = 난 ‘황진이’를 쓰면서 개성에 안 갔다. ‘높새바람’도 작품 배경이 마산인데 가 볼 수가 없었다. 황형도 북한에 못 와봤지만 ‘장길산’을 잘 썼다.

▲황석영 = ‘장길산’은 이북 지도를 펼쳐놓고 조선시대 의금부 공초 기록을 뒤져가며 쓴 것이다. 내가 작품 무대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면 그렇게 쓰지 못했을 것이다.

▲홍석중 = 우리 민족문학은 우물안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물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밖에서 뭔가 해주기를 바라면 되는 일이 없어.

황형은 그동안 어려운 선구자의 길을 걸어왔는데 부탁이 있다. 꼭 남쪽만 생각하지 말고 북과 남을 같이 끌고 가는 노릇을 해줬으면 한다.

▲황석영 = 16년 전 나 혼자 북에 와 뒷골목 다니듯이 다녔는데 지금 남쪽 문인 100여 명이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왔다. 이제 남북 문학이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인위적 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같은 말을 써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말을 누가, 무엇이 갈라 놓을 수 있는가. 우리 문학은 하나다.

세월이 흘러 통일이 된 뒤 우리 후세들은 ‘남과 북을 철통같이 갈라놓았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라며 깜짝 놀랄 것이다. 철통같은 분단의 벽 밑으로 소통이 있었던 것이다. 홍석중형과의 귀한 인연도 바로 그런 소통이다.

▲홍석중 = 우리 문학에서만큼은 분단문학이란 말을 쓰지 말자. 1989년 황형이 북에 왔을 때 이미 분단문학은 없어진 것이다.

▲황석영 = 나는 홍형의 그런 낙천성이 부럽기만 하다.

▲홍석중 = ‘황진이’에 대해 남쪽에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왔는데 대부분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것이 못마땅했다. 내 소설이 우리말을 잘 구사했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황석영 = 어떻게 황진이의 폐부 속으로 들어갈 상상을 했는지 대단하다. ‘황진이’는 우리문학의 승리다.

▲홍석중 = 16년 전에 약속했던 것이지만 우리 둘이 같이 작품을 쓰자. 짧은 것이든 긴 것이든 가리지 말자. 이젠 때가 되었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았고 아픔도 같이 느껴왔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늘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친교를 이제 총화의 차원으로 갖고 가야 한다.

우리 둘이 같이 쓰는 것이 우리 문학이 하나되는 것이다. 편지글도 좋고 대담도 좋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자.

▲황석영 = 참 좋은 생각이다. 추진하자. 우리 둘이 소설을 번갈아 이어가며 쓸 수도 있겠다. 우리 후배들이 남북을 오가면서 서로의 원고를 전해주고. 정말 멋진 일이다.

▲홍석중 = 황형이 16년 전 북에 왔다가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썼다. 그만큼 분단의 벽이 높았던 것이다. 남쪽에서는 북쪽 사람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잖은가.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남과 북을 서로를 샅샅이 알고 있다. 문학과 사회 생활은 서로 차이가 있지만, 문학은 문학이고 작가는 작가다. 남이든 북이든 창작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황석영 =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기 작품을 제품으로 팔기 위해 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작가의 본질은 같다.

홍석중과 황석영은 같다. 우리민족에게는 천혜의 낙관주의가 있다.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룩하는데 문학의 역할이 분명 있다.

▲홍석중 = 요즘 책 나오는 것 보면 분단을 못 느낀다. 북에서 ‘황진이’가 나온 지 한 달 반만에 남쪽 평론가로부터 연락이 올 정도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