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 ‘발렌타인 데이’와 北 ‘외기러기’

오늘 아침, 북한의 한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발렌타인 데이’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발렌타인데이가 크게 유행하면서 북한에도 이런 문화가 전해졌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2월 14일을 ‘칭런지에(情人節)’라고 해서 남녀간에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다. 친구의 대답은 ‘역시나’였다.

“발렌타인 데이? 그게 무슨 발레 춤인가?”

벌써 10년 가까이 한류(韓流)와 중류(中流)가 북한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지만, 아직까지 북한에 발렌타인데이 문화까지 전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날짜부터가 적당치 않다. 2월 16일은 북한 최대의 명절로 꼽히는 ‘장군님 탄생일’이다. 장군님 탄생일을 앞두고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들이 즐비한데, 북한 청년들이 자본주의 황색바람에 따라 쵸코렛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하는 여유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한국에 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연인들의 사랑 표현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일상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갖지 않고 다정하게 손을 잡고 포옹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고향 북한 처녀 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북한 여성들의 사랑 표현은 한마디로 ‘구식(舊式)’이다. 마음이 가는 남자가 있어도 쉽게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선뜻 다가가지도 못한다. 그러나 일단 자기 사랑이 되면 오직 그 사람에게만 집착한다. 하지만 요즘은 외국을 왕래하는 청년들도 더러 있고 한국 드라마가 오랫동안 유행하면서 20대 청년들 속에서 한국식 사랑 표현을 재현하려는 기미도 보인다.

북한에서도 나름대로 처녀들이 사랑하는 총각에게 선물을 주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있는데, 시대와 계층에 따라 그 유행이 발전해왔다.

80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일반계층(노동자, 농민, 사무직 등)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는 일반적으로 군관이나 제대군인, 제대군인 대학 졸업생(군대복무도 하고 대학도 졸업한 남성들)들이였는데 이런 경우 처녀들이 배우자에게 건네는 선물로는 ‘노동당원증’ 케이스가 최고 유행이었다.

케이스는 당원증을 넣을 수 있도록 나이론 실로 직접 뜬다. 때로는 붉은색 실로 ‘당(黨)깃발’을 새기거나 ‘노동당’이라는 글자를 수놓기도 한다. 가로 6㎝, 세로10㎝ 크기의 케이스에는 길이 150cm 정도의 끈을 달아 몸에 가로질러 멜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끈은 빨간색과 살색, 또는 청색의 실을 엮어 만든다.

일부 여성들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포근하고 따뜻한 장갑을 떠서 선물하기도 했었다. 장갑의 색상은 대체로 청색이나 까만색이였고 손등 쪽에 격자무늬 형식이나 또는 여러 가지 장식을 수놓아 연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정성껏 표시했다.

사실 당증 케이스나 털장갑이 크게 비싼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북한 처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남성에게 자기 손으로 직접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선물이었다.

권력층 여성들은 언제나 당간부나 외교관, 국가안전보위부나 인민보안성 등에 종사하는 남성들을 선호했는데, 이 부류 처녀들은 남성들에 대한 선물도 상당히 대담했다. 부모가 힘있는 집 처녀들은 사랑하는 남성들에게 외화상점의 시계나 가방, 양복 등을 선사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권력층 처녀들의 사랑 표현이 매우 대담해졌다. 최근 평양의 여대생들 중에는 사랑하는 남성에게 기타나 손풍금을 치며 ‘한국노래’를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평양경공업대학 학생들은 함께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데이트 코스’ 중에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서민층 처녀들의 ‘사랑 표현’은 점점 후퇴하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잠꼬대 같은 사랑 타령할 여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특히 북한 남성들의 경제적 무능력과 봉건주의 문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서민층 처녀들은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관심자체가 크게 떨어졌다. 결국 오늘 날 북한에서는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고 혼자 살기로 결심하는 ‘외기러기’ 여성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제는 손 뜨게질로 사랑하는 남성의 당증 케이스를 뜨는 북한 여성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경제난과 사회질서 붕괴에 따라 ‘북한식 로맨스’도 하나 둘 씩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한국의 연인들을 바라볼 때마다 지금도 가난에 부대끼며 사랑 없는 메마른 가슴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북한의 ‘외기러기’들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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