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기업 대북진출 요지경…’엘칸토’ 평양진출 秘스토리

▲ 평양 엘칸토 공장에서 중국으로 연수를 하기 위해 온 북측 노동자들 ⓒ데일리NK

우리나라 고급가죽신발 업계는 ‘금강’ ‘에스콰이어’ 그리고 ‘엘칸토’가 3대 라이벌을 구축하고 있다. 이 세 회사가 서로 경쟁하면서 한국 가죽신발 산업을 이끌어 나가는 셈이다. 각 회사마다 특징이 있고,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다.

필자가 인연을 맺게된 엘칸토는 이미 1994년 8월부터 1996년 3월까지 2년여에 걸쳐 평양진출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북한 내에 공장을 설립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였다. 엘칸토가 평양에 진출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산가족인 그룹 회장의 각별한 관심 때문이었다.

엘칸토 평양공장의 꿈이 점점 멀어지자 회사측에서는 베이징에 소규모공장을 차렸다. 북한 노동자를 데려다 기술을 가리키면서 북한 진출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북경에 소규모 공장 건물 계약이 합의 단계까지 갔으나, 뒤늦게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이마저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엘칸토는 마지막 선택으로 대북사업 차 북한을 자주 왕래하는 필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사례는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다. 평양을 다녀오면 대북사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자를 만나자는 연락이 자주 왔다. 일반적인 경우 필자는 만남을 피하지 않는다. 사람 만나는 것을 업으로 알아왔기 때문에 피할 이유가 없다.

대북사업을 혼자 독점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간다. 이날도 엘칸토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 시내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전처럼 북한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대뜸 상대방이 “엘칸토”를 아느냐고 묻는다. 필자가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평양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도 익히 들었다고 말했다.

南 업체, 대북접근 동향 속속들이 알고 있어

필자는 베이징을 방문하면 보통 호텔에 주로 머물지만, 가끔은 파견 나온 북한 관리들의 숙소를 방문한다. 관리의 집을 찾아서 놀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외부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그들의 숙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편하게 지내는 관계였다.

그래서 북한에서 하고자 하는 경제협력이나, 한국 사람들이 베이징에 와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는 연유에 대해서도 북한 관리들로부터 비교적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개가 베이징에 와서 어떤 상담을 했고, 어떤 허풍 떨고 갔는지도 자주 듣게 된다. 심지어 어떤 한국사람이 돈을 얼마 주겠으니 가족을 찾아 달라고 하소연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나진-선봉지구’에 비싼 비행기를 대절해 다녀온 재벌 회사 관계자도 있다. 특정 회사가 다녀오니까 다른 회사들도 경쟁적으로 방북 비행기 교섭을 하는 모습도 보았다.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났고, 그 중에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얼빠진 회사들도 있었다. 여기서 구체적이 회사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다.

이처럼 북한을 잘알고, 사업도 추진해 본 경험이 있는 필자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시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북한 사람들을 이용해 사기를 친 일도 없고, 일이 안 된다고 해서 그들을 근거 없이 비방한 적도 없다.

엘칸토, 평양진출 의지 진정성 묻어나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 문제와 관련해 필자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으로 자신한다. 돈의 유혹을 받은 적도 많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떳떳하게 일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엘칸토 관계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평양진출이 어렵게 된 연유를 소상히 설명해줬다. 관계자는 ‘엘칸토’를 평양으로 진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필자는 먼저 평양진출 사업계획을 세운 담당자를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우선 만나서 평양진출 계획에 대해 들어볼 생각이었다. 며칠 후 엘칸토 국내 공장 공장장 ‘정주권’ 이사와 필자를 소개한 사람을 포함해 세 사람이 다시 만났다.

최초의 사업계획서와 지난 2년 동안의 추진했던 내용을 모두 들었다. 이젠 별 방법이 없어 평양진출을 포기해야겠다고 말했다. 필자가 다시 제안을 했다.

우선 회장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평양진출 의사의 진정성을 회사 오너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만 지켜준다면 일을 추진해보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엘칸토 회장을 만나 몇 가지 부탁과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당시 했던 부탁은 세가지다.

첫째, 투자하게 되면 아무런 조건(가족을 찾아 달라 먼저 만나게 해달라 등)없이 합의한 내용대로 진행 해 줄 것.

둘째, 만일의 경우 투자하여 실패 하더라도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투자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지 않고 미련 없이 과감히 포기할 각오를 할 것.

마지막으로 투자 관계로 일차 방북 후 진행 가능성 여부를 토론한 후 귀국하여 필요하다면 회장님의 위임장을 요구할 수 있으니 사전 약속해줄 것.

1997년, 방북시에는 김일성 동상 참배 반드시 거쳐야

필자의 사업 추진에 관한 업무협조도 요청했다.

첫째, 일단 북한을 방문하면 북측과 상담을 통해 진출 가능성을 판단하겠으니 출장 경비는 실 경비로 계산 해 달라고 했다. 둘째, 사업은 한 두 번의 평양방문으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본인의 판단대로 자유로이 방북 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사업의 성공을 위해 평양진출을 위한 전문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우선적으로 협조가 이루어지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야 시간과 돈이 절약된다.

이렇게 하여 “엘칸토”호는 “평양 항”으로 향해 출항이 시작되었다.

당시 필자는 자신이 있었다. 그 동안의 많은 경험을 통해 북한 사람들의 생리와 협상방법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누구를 만나 어떤 순서를 거쳐 어떻게 무슨 서류를 만들어 합의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장점을 북한측에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사업을 추진하면 지도자 동지로 하여금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다.

1997년 3월11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이른 봄날 따스함이 느껴졌다. 항상 그랬듯이 몇 사람의 반가운 안내를 받으며 벤츠를 타고 먼저 김일성 수령 동상으로 향했다. 이것이 북한 방문의 코스였다. 개인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랬다가는 사업이고 뭐고 말도 꺼내기 어렵다.

저녁 환영만찬을 하고 모두들 술에 취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를 욕하고 조선을 자랑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고향의 봄’ 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눈물도 흘린다. 이것은 이제 하나의 관례가 됐다.

이튿날 아침 9시 반에 만경대 옛집을 방문하고(갈 때마다 방문해야 한다) 동 평양 대성백화점 옆에 자리 잡은 5층 건물 “광명성경제연합회”를 방문했다. 방이 100개정도 되고 연합회 산하 회사들이 전부 이 건물 안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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