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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식량계획(WFP)이 집중폭우로 발생한 북한 수재민들에게 긴급구호식량을 제공하겠다는 제의에 북한당국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26일 WFP 방콕사무소 폴 리슬리 대변인은 “WFP가 집중폭우로 피해가 큰 평안남도 성천군에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북한당국이 수락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폴 리슬리 대변인은 “북한당국이 일단 WFP의 구호식량을 수락하면 그 배분에 대한 모니터링 실시를 허용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침묵의 배경을 설명했다. 수해현장이 국제사회에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주민들에게 공급할 식량지원을 마다한다는 것이다.
‘김정일 체면’ 깎이는 게 두려워
북한의 이러한 행동은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대아사 기간)과 닮은 꼴을 해가고 있다. 95년 북한에 연일 쏟아진 홍수로 ‘100년만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민등산이 밀려 내려와 살림집을 덮치고, 철길과 도로가 끊어지고, 수십만 정보의 논밭이 침수되었다.
95~97년 매해 홍수가 겹치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국가에서 배급이 끊기자 주민들은 무리로 굶어 죽었다. 시체가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어도 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북한이 국제사회의 긴급구호식량을 요청하지 않은 원인은 이른바 ‘국가체면’이 깎이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미 70년대 식량 ‘자급자족 국가’로 유엔농업기구에 등재한 북한은 주민들에게 옥수수밥을 먹이면서도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나라들에 식량원조를 했다. 84년에는 남한 수재민들에게 쌀 5만석을 보내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한 식량지원 국가가 농사가 망했다고 ‘쪽 팔리게 구걸하지 않는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결과 장사도 할 줄 모르고 국가배급에만 매달려 살던 충실한 당원 5만 명을 포함한 3백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특히 평안북도와 자강도 지방의 지하갱도에 근무하는 군수공장 노동자들과 대규모 기계공장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죽었다.
90년대 중반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낸 ‘쓰라린 아픔’을 안고 있는 김정일 정권이 또 내부 상황이 국제사회에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주겠다는 식량도 못받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0일 당창건 기념일을 계기로 식량배급제를 재개하면서 국제구호단체의 식량지원을 거부하고 평양사무소 직원들에게 철수령을 내렸다. 이때도 식량원천이 확보되었다기보다 국제사회에 북한 내부소식이 새어나가는 것이 두려워 취한 조치였다.
지금 김정일은 자기 체면과 내부 사정이 알려질까 두려워 국제사회의 지원식량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인민들의 목숨보다 자기 ‘체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김정일이다.
한영진 기자 (평양출신, 2002년 입국)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