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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현재 ‘긴급구호’ 방식의 국제기구 식량지원을 받지 않고, ‘개발복구’ 방식으로 변경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세계식량기구(WFP) 평양사무소 폐쇄와 식량배급 모니터링 요원 철수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북한은 10월 1일부터 새로운 식량배급 체계를 도입할 전망이다. 그 방식이 식량을 국가에서 독점 판매하는 방식인지, 과거와 같은 식량배급 체계로 완전히 복귀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증언이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충분한 식량수급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내부 소식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현 식량시정을 회의적으로 평가한다. 갑작스레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아해 하고 있다. 이에 DailyNK는 북-중 국경지역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특파원들과 채팅 인터뷰를 통해 각종 증언을 정리해보고, 향후 전망을 알아보았다.
DailyNK는 북-중 국경의 동부지역에 김영진 특파원, 서부지역에 권정현 특파원을 파견하여, 상주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다. 북한관련 취재활동의 특성상 두 특파원은 가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채팅 인터뷰는 9월 8일 저녁과 9월 9일 오전에 걸쳐 이루어 졌으며, 곽대중 기자가 사회를 맡아 내용을 정리했다.
식량수급체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
곽대중 : 먼저 최근 식량배급체계 변화에 대해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데, 정확히 정리를 해주시죠.
권정현 : 저는 8월 27일경에 처음 증언을 접했습니다. 당시 본사의 지시로 ‘강영세 비리사건’을 취재 중이었는데 중국 대방(무역상)과 쌀을 주로 거래하는 북한 장사꾼이 “앞으로는 이 장사도 못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더군요. 그래서 물어보니 “9월부터 장마당에서 쌀 장사를 못하게 하고, 국가에서 개인에게 쌀을 사들여 판매한다”고 말하면서 “그것 때문에 주민들은 좋아하고 장사꾼들의 원성은 높다”고 북한 내부 상황을 전해줬습니다.
곽 : 9월에 실시될 제도가 8월 27일까지도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권 : 북한은 워낙 전격적으로 정책을 실시하는지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도 보름 전까지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바로 전날에야 각 시군 행정단위로 지침이 내려갔죠. “밀봉되어 전해진 지시문을 반드시 7월 1일 아침에 열어보라고 지시가 내려왔다”는 소문까지 있었죠.
김영진 : 저는 권정현 기자의 전화를 받고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워낙 황당해서 믿기지 않더군요. 제가 접촉하는 취재원들도 금시초문이라고 했습니다. 권기자에게도 “증언의 신빙성이 없다”고 전해줬고요.
권 : 저 역시 신의주 지역 장사꾼들에게는 확인이 되는데, 다른 지역 장사꾼들에게는 체크가 되지 않아 보도를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8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보도가 되더군요,
곽 : 동아일보 보도는 국가독점판매가 아니라 ‘식량배급 재개’인데?
권 : 여하튼 식량수급체계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했습니다.
김 : 저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에 (북)내부소식통을 가동해봤습니다. 그랬더니 무산, 온성군의 당간부들에게서 앞으로는 국가에서 쌀을 판매한다, 장마당에서 쌀 판매는 금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곽 : 왜 처음에는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까?
김 : (웃음) 너무 황당해서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권 : 저는 지금까지도 북한 당국도 완전한 멍텅구리가 아닌데 어떻게 그런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참으로 의아하기만 합니다.
“남한도 우리가 ‘선군방패’로 지켜주고 있다”
곽 : 북한 당국이 그런 Ⅹ짓을 한 게 어디 한두 번 입니까? (모두 웃음). 김기자가 지난 8일에 보내온 기사에는 동아일보 기사내용과 비슷한 배급제로의 복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김 :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사에 썼듯 ‘배급제 복귀’라고 증언해준 사람이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외화벌이 일꾼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해외여행자들에게 ‘외국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암기하도록 교육하는데, 알다시피 ‘북한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내용입니다. 배급제 복귀도 ‘이제 공화국이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희망사항’의 선전내용일 수 있죠.
그 사람과 1시간동안 이야기했는데 40여분 동안은 미국과 한나라당을 욕하고, 북한 핵보유의 정당성을 설교하는 데 집중하더군요. 제가 말할 틈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곽 :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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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최근 反한나라당 교양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은 친북사이트의 反한나라당 선전내용 |
김 : 특히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 내용이 많았습니다. 한나라당은 통일의 독초다, 썩어빠진 인간말종들의 집단이다, 미국놈들보다 더 나쁘다,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가로막고 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특별히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나쁘다’고만 하고 제 손을 꼭 잡고는 ‘한나라당을 반대해서 견결히 싸워줄 것’을 부탁하더군요.
곽 : 북한 핵무기에 대해서는요?
김 : 그것도 상투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미 핵을 만들었다, 미국놈들이 우리를 깔보니까 선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남한도 우리가 ‘선군방패’로 지켜주고 있다, 이런 식의 이야기입니다.
곽 : 평화적 핵이용이나 6자회담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가요?
김 : 그런 식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미국놈들은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면서 우리 공화국의 핵문제만 걸고 넘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6자회담이 지금 휴회 중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곽 : 그럼 다시 식량문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지금 북한의 일련의 행동을 보면 식량문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는 듯한데, 내부 사정은 어떻습니까?
권 : 신의주는 원래 잘사는 동네니까 제외하고…… 식량난 때도 신의주에서 죽은 사람은 본래 신의주 주민이 아니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신의주까지 왔다가 굶주려 죽은 외지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신의주 이외 평안도 지역은 완전 쌀밥을 먹는 집이 10~20%정도, 3:7밥이나 5:5밥(쌀과 강냉이의 비율)을 먹는 수준의 집이 50%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강냉이죽이라도 어떻게든 끓여먹고 살고, 여하튼 완전히 굶주리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2~3년 전과 비교해서 많이 나아졌다고 판단됩니다.
김 : 함경도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굶어 죽는 사람들은 없죠.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었다”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식량이 풍족하거나 남아도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올해 7월부터 남한에서 들어온 지원미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쌀 가격이 내려가는 기현상이 보이고는 있지만 배급을 재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풍년이지만 배급 재개할 형편은 못 돼
곽 : 작년과 올해 북한이 풍년을 이루었다는 말이 있던데?
김 : 그렇습니다. 하지만 풍년이라고 해봤자 식량부족량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북한당국이나 국제기구는 북한의 식량부족량을 약 80~120만 톤 정도로 추산하는데, 올해 대략 90만 톤 정도가 지원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족분이 지원식량으로 다 채워진다 해도 그건 북한 식량의 ‘최소 필요치’입니다.
지금 북한의 수확량은 쌀과 강냉이 뿐 아니라 감자, 수수, 밀, 보리 등 모든 잡곡을 포함한 것인데, 이 상태에서 배급제로 복귀할 수 없죠. 풍년이 들었다 해도 쌀과 강냉이가 예전보다 50% 이상의 생산증대가 있어야 완전한 배급이 가능할 텐데, 그건 북한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권 :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 농업을 ‘인민경제 건설의 주공전선’이라고 선언했고, 모내기철에 장사를 일체 금지시키고 전 주민을 모내기에 동원하는 등 ‘독하게’ 움직이는 동향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집단농 체계의 본질적 문제점, 토양의 산성화 등으로 인해 생산량 증대에 한계가 뚜렷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개혁없이 80년대 이전의 배급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곽 : 북한의 기후여건이 원래 쌀농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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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걷이에 열중인 북한 주민들<사진:연합> |
김 : (웃음) 북한보다 더 북쪽지역인 이곳 중국 만주지역에서도 쌀 농사는 잘 됩니다. 지금은 중국 쌀이 북한으로 들어가는데, 개인농만 허락되면 북한의 맛좋은 쌀이 중국으로 수출될 것입니다.
곽 : 배급체계 변화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시죠.
김 : 8일 저녁에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들어온 장사꾼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9월부터 쌀 장사를 못하게 하고 있답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것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공산품 판매도 못하게 한다는 군요. 함경도 지역에서 들려오는 정보는 이제 대체로 ‘장사금지’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장마당에서 쌀판매를 금지한 곳은 청진, 무산, 경성, 이 세군데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쌀을 수매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아직 구체적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정책운용방향에 대해서는 지금 말할 시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권 : 지금 들어오는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런 방식은 가능합니다. 공장 가동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주요 기업소에 대해서는 식량배급을 재개하고, 장마당을 통제하면서 국영상점을 통해서만 식량을 판매하는 거죠. 따라서 출근하는 사람은 식량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먹어야겠죠. 이런 식으로 해서 점차적으로 과거 사회주의 운영 시스템으로 복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도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장가동률이 턱없이 낮다는 것이고, 둘째는 장마당을 통제하면 직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벌어 먹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 창건 60돌 앞둔 과시용 정책인 듯
곽 :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권 : 북한 정권은 주기적으로 장마당을 통제해왔습니다.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로도 월급을 준다 못 준다, 배급을 준다 못 준다 하는 조치를 반복해왔습니다. 이번에도 풍년과 지원식량 증가로 인해 식량사정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으니까 한번 호기를 부려보는 것 같습니다. 10월 10일이 노동당 창건 60돌이라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김 :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9.9절(공화국 창건일)은 조용하게 지나갔지만 10.10절은 요란하게 치를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대내외적 이벤트가 필요하겠죠. 6자회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쯤이면 어떤 결론이 도출되어 있을 것입니다.
북한이 무언가를 얻어낸다면 축제의 분위기에서, 미국과 갈라선다면 ‘결전’을 다짐하는 분위기에서 행사가 치러질 것입니다. 여하튼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이제 ‘한참 잘나가던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식량배급을 재개하는 제스처를 취한다고 보입니다.
곽 : 아무튼 김정일이 경제 문외한인 것은 다시 한번 증명되는군요. 7.1 경제관리조치 이후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다시한번 엉뚱한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것을 생각하니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군요. 아무쪼록 두 분 건강하시고, 활발한 취재활동 기대합니다.
권, 김 : 네, 감사합니다.
대담, 정리 :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