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8말9초’ 학교폭력, 영화 ‘친구’보다 더 심각했다

▲ 북한의 중학교 학생들

학교 주변에서 학생들 간 패싸움은 비단 우리나라 문제뿐 아니다.

통제와 감시가 살벌한 북한에도 학교폭력과 집단 패싸움이 있다. 북한도 한때 중학생(15~17세)들의 학교폭력과 집단 패싸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시기가 있었다.

규모와 폭력수위 또한 남한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심각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본 영화 ‘친구’도 북한의 학교폭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학교폭력은 80년대 후반 90년대에 들어서며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1천명 단위로 늘어나며 절정을 이루었다.

내가 살던 도시(함흥)의 모든 고등중학교(남한의 고등학교)에서 ‘조직'(패)가 형성되었고 점차 각 학교들의 패를 망라한 몇 개의 큰 조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사춘기 ‘소영웅심리’가 폭력 확대

1990년 1월 차가운 겨울 어느 날. 함흥시 회상구역 호련천 제방 위 양쪽에 각각 수백 명의 학생(15~17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꽹과리와 북을 들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야구 방망이나 ‘짱돌'(자갈), 각목 등으로 무장했다.

잠시후 꽹과리와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양측 진영에서 일제히 “나가자!”라는 구호가 터졌다. 이와 동시에 하늘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양측에 자갈이 빗발쳤다. 이들 무리 속에 당시 중학생이던 나와 내 친구도 있었다.

내 친구 명일이는 싸움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고 특유의 끈질김 때문에 회상구역 내 우리 또래들 중에서 소문난 친구였다. 그날도 명일이는 인민군 겨울 솜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우리 패의 선두에서 ‘용맹’을 떨쳤다.

돌격으로 마주친 양측은 1m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야구방망이와 각목을 휘둘렀다. 뒤에 선 친구들은 손에서 쥐가 날 정도로 자갈을 뿌려댔다. 10여분의 밀고 당기는 공방전 끝에 내가 속한 패가 먼저 승기를 잡고 상대편을 500m 정도 밀어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먼저 밀리는 쪽이 지게 돼 있다. 또 먼저 밀리는 쪽은 과반수가 부상을 감내해야 할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다.

첫 회전에서 이긴 우리 조직은 ‘대갈'(두목)들 간의 담판을 통해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며 대오를 정비한 후 2차 회전에 돌입했다.

2차전은 상대측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1차와 마찬가지로 서로 마주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우리조직의 후미가 무너져 밀리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던 명일이는 몇 십 명의 우리 동료들과 함께 상대측 무리에 포위되어 무차별 난타를 당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아나던 이때 누군가가 “명일이가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소리 쳤다. 그 소리에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포위된 동료들과 난투를 벌이던 상대측은 예상치 못한 우리의 재반격에 다시 뒤로 밀려났다.

이날 명일이는 양볼이 찢어지고 머리가 여러 군데 깨지는 등 심한 부상을 입었다. 나도 2차전 뒤로 밀릴 때 머리에 한 개의 돌덩이를 맞았지만 다행히 두꺼운 솜 모자 덕에 머리가 깨지는 부상은 면했다. 이날의 싸움은 명일이가 주동이 되어 앞에서 승기를 잡은 덕에 우리가 두번 다 완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사건으로 명일이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우상이 되었다. 또 명일이의 무훈담은 회상구역 전체 고등중학교 5,6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유명인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양쪽에 편을 나누어 진을 친 수백 명의 학생들은 당시 함흥시 회상구역의 패권을 쥔 ‘형사'(두목의 별명)파와, 성천구역의 패권자 ‘마따뻬루'(두목의 별명, 쿠바 영화 ‘농장주’의 반란군 두목 이름)파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싸움에서 승패가 정확히 갈라지지 않았다는 논란이 생겼다. 이 때문에 곧 ‘대갈’들 간의 담판이 있었고, 대갈들은 “돌아오는 2월 한 달간을 패싸움 월간”으로 약속했다.

약속의 내용은 “서로간의 조직원들끼리 함흥시 어느 구역, 어느 지역에서 마주쳐도 무조건 싸움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따뻬루파와 패싸움을 벌였다.

한번은 회상구역 정성동에 있는 원교다리를 기점으로 무궤도 전차(전기로 움직이는 버스)와 시민들이 가득한 도로 한복판에서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싸움이 일어나자 도로는 순식간에 학생들의 싸움터로 변했고 오가던 버스는 길가에 방치되고 시민들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식량난 때문에 패싸움 자연히 없어져

90년대에 들어서며 청소년들의 폭력이 도를 넘어서자 북한당국은 집중단속에 나섰다. 3륜 모터사이클로 기동순찰대를 편성하여 학생들의 집단 패싸움 현장에 24시간 즉시 출동 가능한 체계를 만들어 현장에서 학생들을 검거했다.

또 학교당국과 긴밀히 연계하여 학생들의 수업출석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고 집단 패싸움을 수차례에 걸쳐 조직하거나 주동한 학생은 소년교화소(소년원)로 보냈다. 나아가 그 가족들까지 산골 오지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얼마나 학교폭력이 심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머리가 터져 학교에 나온 학생은 학교당국과 담당 안전원(경찰)의 1차 조사 대상이었다.

90년 8월에는 회상구역 관내의 모든 중학교 5,6학년 남학생 2천여 명을 구역 문화회관에 소집시켰다. 이후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폐해를 열거하고 주동자(학생)들의 죄상을 열거한 후 구역안전부(경찰서) 안전원(경찰)들이 현장에서 수갑을 채워 소년교화소로 보냈다.

당시 성천구역에서 기승을 부리던 학생두목 마따뻬루는 소년교화 3년에 처해져 감옥에 갔다. 여기에 부모들까지 가세해 늦은 저녁이면 밖에 못나가게 통제하고 불량학생들을 집에 못 오도록 통제하면서 패싸움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곧이어 북한에 극심한 식량난이 닥치자 집단 패싸움도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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