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6·25전쟁 때 대승 거뒀다 선전하는 5대전투는?

북한에서 6·25전쟁을 상기할 때에는 ‘5대전투’와 전쟁영웅들을 빼놓을 수 없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부터 줄곧 ‘전쟁관념’을 주입해 온 북한은 이들 전투와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화와 각종 강연을 통해 체제결속을 위한 선전선동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의 ‘5대전투’=인민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선전되는 5대전투에는 ▲주문진 해전 ▲대전 해방작전(전투) ▲월미도 방어전투 ▲1211고지 전투 ▲351고지 전투 등이 있다.


‘주문진 해전’은 1950년 7월 2일 벌어졌던 전투로 북한은 당시 4척으로 편성된 제2어뢰정대가 미군과 다국적 무력으로 구성된 함대를 불시에 타격해 중순양함과 경순양함을 바다에 수장하는 전과를 올렸다면서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빛나는 기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전쟁 직후 어뢰정대에는 ‘근위'(훈장명, 특출한 공훈을 세운 부대 또는 연합 부대) 칭호가, 부대장에게는 ‘공화국영웅’ 칭호가 하사됐고, 조국해방전쟁기념관(평양 소재)에는 당시 어뢰정이 전시돼 있다.


1950년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대전 해방작전’은 19세의 병사가 미군 사단장을 생포했다는 내용으로 선전되고 있다. 북한은 “미제와 남조선괴뢰는 대전에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불퇴의 선’, ‘최종방어선’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위대한 최고사령관 김일성 동지께서 조성된 정세와 전선형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신데 기초하시여 조직지휘하신 결과 미제 제24사단과 이승만 괴뢰군 패잔병들을 완전히 격멸·소탕하고 2만4338명의 적을 살상·포로 하였으며 사단장 딘(dean)을 생포하고 150여문의 포와 49대의 땅크(탱크), 1000여대의 군용자동차를 파괴하였다”고 과장해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전전투를 지휘한 제24사단 사단장 딘이 미 8군사령관 워커중장에게 보고한(1950년 7월 18일) 내용에 따르면 당시 전투에 총 3883명이 참전했고 전사 48명, 실종 874명, 부상 22명 등 1150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다.


‘월미도 방어전투’는 1950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인천 월미도에서 벌어졌던 전투다. 이 전투를 주제로 만들어 진 영화 ‘월미도’는 북한에서 만들어 진 수많은 전쟁영화 중에도 주민들이 첫손에 꼽는 영화다. ‘3일간 버티라’는 명령에 따라 당시 월미도에 주둔해 있던 인민군 226육전대 독립연대의 1개 중대와 918 해안 포병연대가 여러 척의 미 군함을 격침시키고, 상륙을 사흘이나 지연시켰다는 전투다. 


이에 대해 당시 월미도 상륙작전에 참가한 미국병사 프레드 데이비슨 상병은 수기를 통해 “저항은 없었고 고요했다. 전투 전반 일부 해병(미군)들은 전투보다도 손들고 항복해 나오는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느라 바빴다. 월미도 전투에서 북한군은 200명이 섬멸됐고, 136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미 해병은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만 17명이 발생했다. 북한군 대부분이 남한에서 억지로 징집한 의용군 출신들이였다”고 회고했다.


1951년 9월부터 10월까지 벌어졌던 강원도 금강군 ‘1211고지’ 전투는 ‘이수복’이라는 영웅을 낳은 역사적 전투로 소개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의 지시 등 꼭 달성해야 할 과제를 제시할 때 지금도 ‘1211고지’라는 명칭을 붙일 만큼 이 전투를 미화하고 있다. ‘오늘 농업전선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1211고지이다’라는 식이다.


북한 당국은 이에 대해 6·25전쟁 당시 동부전선의 최대요충지 중 하나인 1211고지를 점령할 것에 대한 명령에 따라 “한 치의 땅도 적에게 내어주지 말라는 최고사령관 동지의 명령을 심장깊이 새긴 영웅적 조선인민군의 피어린 전투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1953년 6월 2일부터 50일여일 동안 벌어졌던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 전투도 군인과 학생들에게 강조되는 전투 중 하나다. 당시 적(연합군)에게 빼앗긴 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십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전투로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가르쳐 주신 전략과 전술대로 싸운 결과 고지를 탈환하고 지킬 수 있었다’고 선전하면서, 인민군의 전술 원칙과 전투준칙을 세우는데 교본으로 삼고 있다.


◆전쟁영웅도 ‘수령우상화’에 이용=북한에선 또한 전쟁영웅들을 내세워 생산을 독려하거나 김정일과 당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등의 체제결속에 이용하고 있다. 이들은 교과서에서도 소개돼 있다. 대표적 전쟁영웅으로는 이수복, 강호영, 조군실 등이 있다.


북한은 ‘1211고지’ 전투에서 숨진 이수복(1952년 공화국영웅 칭호 받음)에 대해 ‘적의 화구를 가슴으로 막고 부대의 진격로를 열고 장열하게 전사한 영웅’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이수복이 전쟁 전에 다니던 화학전문학교를 ‘리수복전문학교’로 개명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 당시 이수복이 쓴 “나는 조선청년이었다. 청춘도 귀중하고 생명도 귀중하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해 둘도 없는 목숨이지만 나의 청춘, 나의 희망, 나의 미래를 조국을 위해 바친다”는 시는 ‘영웅의 나이 열여덟이었네’는 제목의 노래로 불리고 있고, 남한에선 일부를 개사해 ‘조국과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80~90년대 운동권들에게 불려졌다.


강호영은 양 팔에 부상을 입고 팔을 쓸 수 없게 되자 입에 반탱크(대전차) 수류탄을 물고 적진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강호영이 다니던 중학교도 그의 이름을 붙여 학교명을 개명했다. 


중화기 사수였던 조군실은 전투에서 팔과 다리 온 몸에 부상을 입고 “나의 팔과 다리는 더 쓸 수 없다. 하지만 끝까지 싸울 것이다”는 내용의 말을 하면서, 입으로 중기관총의 압철(방아쇠)을 눌러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 조선전쟁기념관에는 조군실의 군상이 있다. 이 밖에도 원산에는 조군실공업대학이 있는 등 현재도 주민들과 청년들에게 조국애와 충실성의 귀감으로 소개되고 있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는 ‘입으로 중기관총의 압철을 눌러 싸웠다’는 가사의 노래도 실려 있다.


1951년 강원도 법동군의 한 야전병원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호송하던 중 폭격을 당해 군인들을 구하다가 죽은 안영애도 전쟁영웅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죽기 전 가슴에서 당증을 꺼내 “이 당증을 당중앙위원회에 전해주십시오”라고 한 말 때문이다.


북한은 자남산대학을 ‘안영애대학’으로 명명했고, 1971년 안영애를 소재로 ‘당의 참된 딸’이라는 가극(5대 가극 중 하나)과 예술영화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수령우상화에 대한 교양 선전물로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