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女동생’ 역할까지 세습?…김여정 활약 ‘주목’

11일 예고된 북한 노동당대표자회 ‘당대표자’로 비공식 선출된 김여정은 김정은 시대에 고모 김경희와 비슷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경희는 김정일의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로 1946년 생이다. 1942년생인 김정일과는 4살 터울로, 김여정과 김정은도 이와 비슷하다. 김정은과 김여정은 올해 각각 29세, 25세로 추정되고 있다.  


김경희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1971년 10월, 25세의 나이로 민주여성동맹 중앙위 임원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김일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성택과 결혼했다.


김경희가 노동당에 등장한 것은 1975년 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1과 과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국제부 1과 과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2과장이었던 김용순과 함께 국제부의 대부분 사항을 결정하는 실권을 가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다.


1990년 4월 제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10기, 11기, 12기 대의원에 연이어 이름을 올렸고 1995년 당 경제정책검열부장 등을 거쳐 1997년 당 경공업부장으로 발탁됐다.


그러다 2003년 9월 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기념 촬영 이후 2009년 6월까지 중앙정치무대에서 종적을 감췄다. 종적을 감춘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당시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과의 불화와 2006년 프랑스 유학중이던 친딸 장금송이 부모의 결혼 반대로 자살했던 일 등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경희는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중앙정치무대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에 대한 간병뿐 아니라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도 했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전까지 현지지도에 최다 동행하는 등 신체적, 정신적으로 김정일을 보좌했다.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에서 북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인민군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고, 이어 당 대표자회 정치국원에 선출되면서 정치적 위상까지 높아졌다. 


그러나 김경희의 진가는 화려한 정치력보다는 김씨 일가의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오는 카리스마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김경희는 김정일의 복잡한 여인관계와 이복 형제들의 문제를 물 밑에서 해결하는 등 김 씨 일가의 가정사를 도맡아 해결해왔다. 김정남(김정일의 장남)과 동갑내기인 김일성의 아들을 직접 키웠다는 소문도 있다.


또 김정일이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에게 빠져있을 당시 부인인 성혜림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그 자녀들을 돌보기도 했다. 고영희가 북한의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할 때에도 김경희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경희는 김정일에게 스스럼없이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동당 간부 출신의 한 탈북자는 “김정일 시대 김경희는 공식적으로 당 경공업부장이란 직책을 맡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정일의 가장 충실한 조언자의 역할을 수행했다”며 “간부들 사이에서는 ‘자기동생이 하늘의 별이라도 따 달라면 김정일이 따 줄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실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도 김경희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경희는 1990년대 말 자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의 집을 한밤중에 찾아가 저녁을 먹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부실한 상차림에 난감해 하는 연형묵의 모습을 보고는 김정일에게 이를 좋게 보고했고, 이후 김정일은 연형묵을 “가장 믿을 만한 동행자”로 평가했다. 


2009년 화폐개혁 직후 김정일이 당 중앙전원회의에 참가한 도당 책임비서들에게 화폐개혁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물었을 당시, 오직 최룡해만이 “황해북도 주민들은 고통스러워 한다. 굶어죽는 사람도 있다”고 보고했던 사례가 있었다. 김정일은 그자리에서 김경희에게 “즉시 평성시 시장에 나가 실태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혈연 중심의 폐쇄적 통치체제를 이어온 북한 지도자들의 과거 사례로 볼 때, 김정은 역시 정치 영역 외의 개인적 문제는 김여정에게 상당 부분 의존할 것으로 보인다. 최고권력에 대한 부자세습뿐 아니라 ‘여동생’의 역할까지 세습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