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힐과 무슨 얘기하고 싶을까

작년 6월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비롯해 수 차례 힐 차관보를 초청했을 뿐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과의 고위급 방문외교를 희망해온 북한으로선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 자체만으로도 국제사회에 전하고 싶은 정치적 메시지를 충분히 던지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들어선 부시 행정부가 그동안 북한과 직접 협상을 배제해 오다가 지난 1월 베를린 회담을 시작으로 북한을 양자협상의 대상으로 사실상 인정해온 데 이어 이번 힐 차관보의 전격 방북은 북.미 양자대화를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미국과 직접적인 양자 ’대화 상대’라는 대 내외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손에 쥔 셈이다.

북한이 힐과 논의하려는 구체적인 의제도 이러한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힐은 북한의 비핵화 과정과 절차를 가능한 앞당기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면, 북한은 미국과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양자관계를 ’제도화’하는 계기로 활용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북한이 제기할 구체적인 의제로는 ’2.13합의’에 포함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및 대적성국 교역금지 대상 해제 문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방코 델타 아시아(BDA)의 북한자금 송금이 일회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상적인 국제금융 거래에 대한 보장 문제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으로선 2.13 합의의 1단계 조치의 신속한 이행을 다짐하고 있는 만큼, 2단계로 넘어가기 앞서 이들 문제를 명확히 짚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BDA 해결 과정에서 북한이 미국에 대해 보인 입장을 감안하면, 미국이 뉴욕의 연방준비은행까지 동원해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나타낸 것에 대한 북측의 평가도 예상된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1일 힐 차관보의 방북 발표 직전 평양발 기사에서 “미국이 연방준비은행을 개입시키는 방법으로 BDA 문제의 해결 과정에 착수하자 지체없이 행동한 것은 조선이 미국의 정책적 결단에 바로 호응할 용의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북한의 대미외교를 이끌고 있는 실세인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힐 차관보를 만나게 되면, 이런 구체적인 사안보다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해온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전환 의지, 곧 북미관계 정상화 의지를 확인해보고 그 바탕 위에서 관계정상화의 로드맵에 관해 속깊은 얘기를 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금융체제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북미간 여러차례 협의를 통해 점차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며 “북한이 이 문제를 제기하겠지만 당장 해결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관계정상화 문제와 더불어 풀어가자는 입장을 표시할 것”이라고 대북 전문가는 말했다.

힐 차관보는 방북기간 북한 핵의 불능화를 최대한 앞당기는 문제를 집중 거론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대해 북한은 부시 대통령이 밝혔던 종전선언을 비롯해 북미관계 정상화 의지를 다각도로 확인해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힐 차관보가 BDA 문제로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앞당기려는 것에 대해선, 북한이 최근 밝혀온 입장에 비춰 영변 핵시설 폐쇄 문제의 경우 최대의 ’성의’를 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북한의 농축우라늄 문제와 이미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핵무기, 과거 생산한 플루토늄 등의 신고 문제를 비롯해 1단계 조치 후 예상돼온 난제들에 관해 북측이 힐 차관보와의 대화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힐 차관보 방북 후의 북미관계와 2.13 합의의 이행 속도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2.13합의’는 북한이 원하는 것과 미국이 원하는 것을 서로 교환한 합의인 만큼, 앞으로 북미간 협상에서 두 주체가 우선과제로 생각하는 내용은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이번 힐 차관보의 방북으로 북미간 정치적 신뢰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생각의 상이함을 극복하는 계기가 돼 양자간 협의가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힐 차관보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전할 때 강 부상을 통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중 전달도 크게 주목되는 대목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