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평양금성정치대학출신 ‘농촌지원전투’ 체험기

▲ 북한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

한창 영농기를 끝내 들판이 푸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영농기가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하죠. 이때가 되면 북한에 있을 때 농촌지원전투에 참가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북한은 영농기가 되면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전국민이 농촌지원전투에 나가야 합니다. 고등중학교 3학년(남한의 중학교1학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농촌으로 내려가야 하고, 저 역시 고등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농촌지원전투는 한마디로 너무도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의 반복,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외지에서, 그것도 농사일을 하며 한 달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울곤 했습니다.

농촌으로 간 학생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식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강냉이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집에서 간단한 간식들을 준비해옵니다. 그러나 그 간식도 얼마 못가서 바닥이 나고 맙니다.

고생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을 다 끝마치지 못하면 밤늦게까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장시간 일하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손은 어린아이 같지 않게 너무도 험해졌습니다.

북한의 농촌은 기계장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인력으로 해야 합니다. 그나마 밭에서 일하는 것은 모내기에 비하면 조금 괜찮은 편입니다. 아무리 늦봄이라도 해도 아침 기온은 쌀쌀 합니다. 새벽 4~5시쯤 작업장에 나가 찬물에 들어가 모내기를 하려면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일하는 고통보다 속마음 털어놓지 못한 고통이 더 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그랬습니다. 비가 와도 모내기철에는 쉬지 못합니다. 비에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며 추위와 싸워야하는 농촌지원전투는 어린나이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농촌지원전투는 김일성의 교시이기 때문에 누구하나 불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린나이라고 왜 감정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고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지만 김일성의 교시이기 때문에 거역하거나 불평하면 그 즉시 ‘민족의 반역자’가 됩고 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하는 고통보다 말 못하고 그냥 당하기만 해야 했던 고통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농촌지원전투는 병이 심한 학생을 제외하고 누구나 무조건 참가해야 합니다. 농촌지원전투에 나가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사상투쟁의 무대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며, 농촌지원전투중 집으로 도망을 가면 부모님까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어린 학생들까지 농사일에 동원하고 있지만 북한의 식량사정은 나아질 줄 모릅니다. 이 모든 게 북한의 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김정일 독재정권 때문입니다. 북한에는 제2경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군사경제를 말하는데 이것이 어디서든 우선입니다. 외국에서 원조가 들어와도 군경제가 제1순위로 배급을 받고, 농촌에서 식량이 생산돼도 군경제에서 먼저 가져갑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군대가 먼저 가져가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노동의욕도 떨어지고, 식량난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죠.

하루 빨리 독재정권이 물러나 북한의 학생들이 농촌지원전투 같은 힘든 노동에 참가하지 않고 맘껏 공부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한성주(27)/평양금성정치대학입학, 2004년 입국

※ 대학생 웹진 바이트(www.i-bait.com)의 양해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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