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핵원칙 포기한 것”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북핵 폐기’ 효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특히 차기 미국 대선을 20여일 앞둔 시점에 테러지원국 해제를 결정한 부시 행정부가 후폭풍을 맞을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11일(현지시간) “미국이 추구했던 모든 요소가 핵검증 패키지에 포함됐다”며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방침을 밝혔다. 이번 합의는 지난주 사흘간 북한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지 부시 대통령의 최종 승인도 이뤄졌다.

당초 6자회담 합의에 따르면 북한이 ‘북핵 폐기 2단계 조치’로 핵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면 미국이 45일 내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키로 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지난 7월 핵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검증의정서’를 둘러싼 미북간 갈등이 커지며 해제 조치가 지연돼 왔다.

북한은 미국이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며 지난 8월부터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에 대한 원상 복구 움직임을 보여왔고, 미국은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테러지원국 해제-불능화 재개’라는 결과물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이번 달 중에는 미북간 핵검증 합의를 추인하기 위한 6자회담도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이며, 지지부진했던 북핵 폐기 2단계도 마무리 수순을 밝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로 미-북이 얻는 득실을 따져 봤을 때 북한의 협상전술에 미국이 완벽하게 말려들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 ‘테러지원국’ 해제…美-北 득실은?=특히 임기 말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 업적을 남기기 위해 원칙을 포기하고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북한에 양보를 한 것이 아니라, 원칙을 포기한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이 임기 말에 정치적 업적을 만들기 위한 정치 협상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공화당 매케인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오바마 후보도 쌍수들어 환영하고 있지는 않다”며 “단기적으로는 부시 개인에게 이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후유증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부시 행정부는 북핵 폐기 2단계 조치를 마무리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미완성의 마무리’라고 봐야 할 것”이라며 “미북간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북한의 실질적인 북핵 폐기를 이끌어 낼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미국 보수진영 내의 반발도 거세다.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일리아나 로스-레티넌 공화당 의원은 “오늘 조치로 인해 부시 행정부는 중요한 지렛대(leverage)를 포기한 셈”이라며 “북한이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하기도 전에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불법적인 핵프그램을 계속하고 극단적인 정권에 핵 협력을 제공하는 일을 부추기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국이 실질적으로 입은 손실이 없는 만큼 일방적 양보라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송 연구원은 이와 관련 “미국이 검증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북한을 다시 테러지원국 명단에 넣을 수 있다고 발표한 만큼 좀 더 두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도 “미국이 새로운 카드로 북한을 압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라며, 다만 “미국의 리더십이나 미국 내 보수층과 일본의 신뢰도는 일부 손상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북한이 얻는 이득은 클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실질적 ‘선물’ 이외에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자신감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대내외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전 연구위원은 “부시 대통령은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북한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며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대내외적으로 통치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 교수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압박이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며 “핵실험 재개 움직임은 북한의 압박 시나리오로 봐야 한다. 불능화 원상복귀 등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것 같다”고 평가했다.

◆ 北 불능화재개…2단계 마무리 되나?=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에 맞춰 불능화 작업을 재개하기로 했지만, 북핵 폐기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북간 합의에는 북한이 과거에 추출했던 플루토늄 양에 대한 검증 뿐 아니라 우라늄농축프로그램 및 핵확산 활동 등에 대한 검증이 포함되긴 했지만, 북한의 미신고 핵관련 시설에 대해서는 미북 상호 동의하에 검증이 이뤄지도록 규정해 향후 검증 이행 과정에서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와 관련 게리 셰모어 미 외교협회(CFR) 부회장은 11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협상은 미 정부가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북한과 모호하게 협상한 점 때문에 향후 북핵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시점이 또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과 북한은 핵 의심시설 접근 문제뿐만 아니라 미국의 검증 전문가들이 핵물질 관련 시료를 북한 외부의 시설로 반출해 검증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얼버무린 것으로 보인다”며 “이 역시 앞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합의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전 연구위원 역시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시설에 대한 사찰에는 한계가 있는 등 검증의정서 내용이 부실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조만간 북핵 폐기 2단계 조치를 점검하기 위한 6자회담이 열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연말까지는 2단계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왔다.

유 교수는 “연내 부시 행정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최소한 2단계 조치는 마무리 될 것”이라며 “곧 열리게 될 6자회담에서 검증 과정을 추인하고 단계별 접근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송 연구위원은 “북한은 당분간 북핵 폐기 협상에 성의 있는 자세로 임하기는 하겠지만, 3단계에 들어가면 난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며 “북한이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꾸준히 쓰고 있는 만큼 북핵 폐기 과정에서 또다시 장애 요소가 발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연구위원은 “1년 정도는 이런 식으로 큰 진전 없이 검증 문제에 대해 실랑이만 이어가다가 미국의 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재정비할 때 다시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동도 그 동안에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