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추석에 더욱 외로워지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북한에서도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추석이 되면 많이들 고향을 찾았다. 고향이 멀어도 휴가를 받아 기차편을 이용해 고향을 찾았다. 지금에 와서는 기차 운행도 원활하지 않은 데다 먹고 살기 힘들어 고향을 찾는 사람은 크게 줄었다.

추석날에 고향을 찾지 않게 되자 명절을 기념하는 분위기도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 부모님 산소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추석을 더 가슴 시리게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생활고에 시달려 ‘죄’아닌 ‘죄’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집을 떠나 유랑하는 꽃제비들, 그리고 10년 간(여성은 7년) 군에 묶여 있는 군인들이다.

2008년 8월에 입국한 탈북자 김 모씨(여·38세)는 “중국에서 살던 중 2006년 여름 중국 경찰에 잡혀 북송돼 감옥에서 그 해 추석을 보냈다”며 “가로 160㎝에 세로 250㎝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방안에 11명이 갇혀 추석날에도 썩은 가루가 섞인 굵은 옥수수쌀밥 세 숟가락에 다 썩은 미역이 둥둥 떠다니는 소금국을 먹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향의 부모님 묘소도 찾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남신의주 백토리 교화소에서는 강 건너 중국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도 들린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고향의 뒷산에 돌봐주는 이 없이 외로이 누워계실 부모님을 생각하고, 불효한 이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며 “감옥의 작은 창문으로 푸른 하늘을 날아에는 새를 보면서 ‘나도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한국 교도소에서는 추석날이면 그래도 고기 반찬이 차려진다고 들었지만 북한 교화소에서는 아무런 대우도 없다. 우대는 커녕 이 날도 매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김 모씨는 자신이 있던 교화소에서 구타를 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말했다.

간수들은 근무시간이면 심심풀이 삼아 갇혀있는 북송자들에게 이유없이 자신의 머리를 벽에 대고 찧으라고 한다. 만약 머리가 아프다고 약하게 찧으면 벌로 더 심하게 찧을 때까지 시킨다. 어떤 때엔 두사람이 마주 서서 서로 머리를 찧으라고 하기도 한다.

북송자들은 벽체에 자신의 머리가 부딪칠 때마다 ‘쿵, 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억울하고 원통해도 하소연 할 곳조차 없었다.

추석날 아침도 수인들은 ‘오늘은 추석인데 설마’하고 생각하지만 이날도 계호원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이들에게 스스로 머리 박는 것을 강요한다. 추석날 돌아가신 부모님께 가볼 수 없는 것만도 가슴 아픈데 매까지 맞아야 하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김 씨는 전했다.

북한 군인들도 추석날 집에가지 못한다. 북한 군대는 강철같은 군사규율 운운하면서 군인들에게 어떤 자유도 주지 않는다. 군사복무 중 부모님의 사망소식을 듣고서도 10년 간 산소 한번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2008년 8월에 입국한 박 모씨(남·38세)는 “군에 입대한 지 일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편지를 받았지만, 장례식은 커녕 산소 찾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고 추억했다.

살아 생전에도 아버님께 효도는 커녕 근심만을 끼친 자식이 땅 속에 묻힌 후에도 근 10년 간 성묘 한 번 할 수 없어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박 모씨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북한의 군대문화는 철창없는 감옥”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추석날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꽃제비다. 이들은 부모님의 산소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이들에게도 집이 있고 부모가 있었지만 ‘대아사’를 거치면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두주먹 맨몸밖에 없었다.

이들중에는 온 집안이 굶어죽게 되자 뿔뿔이 흩어져 나온 후 부모 자식간에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또 굶어죽은 부모님을 산에 묻고 유랑길에 오른 아이들도 태반이다. 아사의 위험만으로도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추석은 비명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아련한 추억만 떠오르게 할뿐이다.

평안북도 신의주시에는 신의주를 둘러싸고 있는 5미터 높이의 뚝이 있다. ‘대아사’시기 신의주시 남중동과 남하동에 위치한 뚝에 가게 되면 짓다 만 온실 자리가 있었다. 당시 이 곳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꽃제비들의 겨울나기용 안식처였다.

꽃제비들은 그래도 벽체나마 서 있는 짓다 만 온실에 모여 주어온 나무를 때면서 언 몸을 녹이고 나름대로의 생활을 진행했다. 또 꽃제비들 중에 섞여 있는 여자애들은 특별히 배려해 바람을 제일 잘 막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정해주기도 했고, 가끔은 자기들 끼리 짝을 맺어 부부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타인들의 눈에는 비록 사람같아 보이지 않고, 유랑 걸식하지만 이들도 추석이면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산 농태기술(개인들이 만든 술)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면서 고향을 생각한다. 굶어 죽은 부모님과 형제들을 추억하고 ‘고향의 봄’ 노래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버려진 인생을 한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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