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최초 무비자 입국사건’, 그 못다한 이야기

▲ 만수대의사당에서 만난 北 김복신 부총리 ⓒ데일리NK

그동안 데일리NK에 ‘북한 최초 무비자 입국’ 사건을 3회에 걸쳐 게재했다. 못다한 이야기를 실어본다.

91년 11월 26일(화요일) 무비자로 북한에 입국했다가, 강제출국 형식으로 토요일 북경으로 다시 나왔다. 북경 도착하자마자 필자의 회사 북경 지사장과 연락해 호텔예약을 했다.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에는 가지도 연락도 하지 않았다. 월요일 사증 받아 화요일 평양으로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한번의 소동이 벌어졌다. 북경 조선대사관 영사부장이 내가 오면 즉시 사증을 줄 생각으로 미리 비자를 만들어 기다린 것이다. 토요일 내내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그도 애가 타서 비행기 떠날 시간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평양-베이징 노선은 당시 화요일과 토요일 2회 운행했다.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내가 나타나지 않자 영사부장이 평양에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작업까지 벌였다. 평양에서는 분명히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떠났다고 하는데, 필자가 대사관에 나타나지 않자 애를 많이 태운 모양이다.

영사부장이 북경지사로 입국확인 전화를 했는데 류지공 지사장도 나에게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해 더욱 긴장 했던 모양이다. 류 지사장에게는 특별히 그렇게 대답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토요일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는데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마중 나온 사람들은 비행기 안에까지 살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나도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골탕(?)을 한번 먹였다.

평양에 가기 위해 화요일 아침 일찍 북경대사관에 갔더니, 영사부장이 나를 보는 순간 기가 막혀 손짓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란다. 커피 한잔 타 놓고 차분히 나를 설득한다. 결론은 한 말로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달라고.

“무비자로 조국에 온 사나이” 북에서도 화제

비자를 받아 공항에서 수속을 하는데 담당이 “선생 때문에 우리 비상이 걸렸댔어요! 사증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입국수속을 했댔어요? 기리지 마시라요”
“아- 그래요 미안하게 됐네요. 그런데 오늘도 사증 없이 나왔는데?”
“농담 마시라요”
이렇게 하여 비행기를 타니 여자 승무원이 눈을 크게 뜨고 반긴다.

“아-니 찬구선생 아닙니까? 토요일 조국에서 선생님 찾느라고 야단 났댔습니다. 비행기를 안 탔다고 했는데도 혹시 우리 골탕 먹이려고 숨어있는지 모르니 다시 잘 찾아보라 하였답니다.”

웃을 수밖에… 비행기 한대가 화요일 토요일 이렇게 다니는데 내가 자주 평양을 드나드니, 나를 평소에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더 유명해졌다.

비행기 안에서는 남자 승무원과 여 승무원이 교대로 나에게 와서 2등실로 가자고 권한다. 너무 거절하기도 민망스러워 자리를 옮겼다.

특별 대접이다. 평양 룡성맥주에 명태포가 나오고 제법 술자리가 벌어졌다. 몇 병 마셨더니 취기가 오른다. 교대시간이라고 비행사도 나에게 와서 맥주 한잔을 권한다. 어떤 사람이 말썽을 부렸는지 궁금하여 날 보러 왔단다.

평양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VIP용 버스를 타고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일부러 일반인 버스를 타고 일반인 수속하는 데로 줄을 섰다. 공항에 도착하니 용심이 생겨 귀빈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귀빈실행 버스가 도착했는데도 내가 안 보이니 약삭빠른 김현철이가 일반승객 수속 문으로 달려왔다. “사장 선생! 왜 여기에 계십니까? 저쪽에서 부위원장 동지와 김선옥 부부장 동지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빈실로 가십시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오늘도 사증 없이 왔으니 그렇게 알아라.” “네?” 하면서 정말로 사증 없이 온 줄 알고 어디론가 뛰어 간다.

재입국 후 농구화 제조공장 건립 계약

차마 그냥 볼 수가 없어 불렀다. “사실은 정식으로 왔는데 마중 나온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으니, 차 어디 있나? 그냥 우리끼리 먼저 가자. 차 대기시켜라!.” 짐 없이 여권밖에 들고 온 것이 없으니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안내원보다 내가 먼저 앞장섰다. 대기했던 차가 내 앞으로 온다. 운전수가 얼른 내려 인사하며 문을 연다.
“현철아 어서 타라. 운전수 동무 어서 갑시다.”
엉겁결에 안내원 현철이가 부위원장과 다른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뛴다.

그리고 나와 함께 호텔까지 먼저 오고 말았다.

내가 화가 단단히 난 줄 알고 있으니 나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 현철이는 나를 제일 많이 안내했으며 내가 평양 방문 때 미리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나의 안내를 맡아 했기 때문에 나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안다. ‘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는 49일간이나 같이 생활도 했다.

평소 같으면 도착한 날 간단한 환영 파티를 하는데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나 혼자 그냥 두라고 했다.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누웠다. 잠결에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1층 당구장에서 김남철 지도원과 김영수 참사가 당구 친다고 내려와서 맥주 한잔 하잔다. 거절할 관계가 아니라 내려가니 현철이도 있다. 매점에서 맥주 한잔씩하고 있는데 다른 몇 사람들도 합쳤다.

이야기는 단연코 ‘무비자로 조국에 온 사나이’가 화제였다. 나는 좀 창피한데 이네들은 이야기꺼리로 편안하게 화제를 만들어가며 폭소를 한다.

이제 출국할 날도 되어가고 무비자 사건을 그냥 넘길 수가 없고, 또 우리는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제대로 하고 산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 해외영접부 김선옥 부부장 앞으로 정식 공문을 작성하여 안내를 통해 전달했다.

재입국한 나는 1주일간 더 머물면서 활발히 사업토론을 하고, 김복신 경공업담당 부총리와 만수대 의사당에서 수차례 면담을 한끝에 수출품 농구화 공장 설립에 대한 계약을 조선경공업무역회사(Korea Light Industry Trading Corporation)와 맺었다.

모든 일들을 차질 없이 만족스럽게 마치고 출국하는 날 호텔비 때문에 시비가 붙었다. 지난주에 계산하지 않은 ‘숙식비 범법자’에게 2중 부담으로 계산한 그 돈! 결국에는 청구대로 지불해야만 했다.

이것도 국법이라는데 이것마저 떼를 쓸 수가 없는 일이라 그냥 웃고 넘겼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갈고리를 품고 참 별스러운 나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공항에 나가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나온 전송객 동지, 동무들과 일일이 뜨거운 손을 잡으며 평양을 가볍게 떠났다.

청구서는 서류전달이나 제대로 됐는지 궁금했는데, 다음에 입국하여 김선옥 부부장을 만났더니 청구서는 잘 받았다고 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를 시켰으니 마음 편히 잘 다니란다.

서류 전달 된 것만 해도 성공적이다.(‘北 최초 무비자 입국사건’ 끝)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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