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떠오르는 ‘김정일 프로파간다’

8일 북한은 5년만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라는 것이 명목상 ‘최고주권기관’으로 되어 있지만 문자 그대로 조선노동당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은 투표를 하긴 하지만 누가 대의원이 되는지도 잘 모른다. 선거표를 ‘찬성’ 투표함에 넣는 것으로 그만이기 때문이다.

조선노동당은 기관지 ‘노동신문’을 발행한다. 가장 중요한 매체다. 조선중앙통신, 조선중앙방송은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제작·관리·감독한다. 지방에는 지방 당위원회 이름을 딴 기관지가 발행된다. 함북일보, 양강일보, 자강일보 식이다.

내각은 ‘민주조선’을 발행한다. 군(軍)은 ‘조선인민군’을 발행하고, 청년동맹(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옛 사로청)은 ‘청년전위’를, 소년단은 ‘소년신문’을 발행한다. 내각 교육성도 ‘교원신문’을 발행한다. 펄프 사정도 좋지 않은 북한에 기관지들이 많은 이유는 ‘선전’을 중시한 구공산권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로 치면 국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사실 이런 식의 표현에 문제는 많지만) 최고인민회의는 기관지는커녕 소식지 하나 발행하지 않는다. 당, 군, 내각의 기능과 역할에 비하면 유명무실하기 때문이고, 이론적으로는 수령-당-노동계급의 영도에 무조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은 6일 “남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가 북한의 최고주권기관으로 알고 있고, 주석단에 등장하는 것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 최고인민회의는 오로지 당의 지시에 따를 뿐 실질적인 지위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황위원장은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명단은 당에서 만들고, 선거위원회도 중앙당 행정부가 조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고인민회의 의장은 외국에 나가면 크게 대우를 받는다. 형식상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국회의장’ 격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청국에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준다. 그래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면 내심 외국에서 초청해주기를 많이 바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황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77년~78년 경 중남미 국가가 각국의 국회대표단을 초청했을 때 한국의 박준규 국회의장을 만나 “이제 먹고사는 문제에서 남한이 북한을 앞질렀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야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며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쏠 준비에 들어가는 등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자 3월 8일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그중 지난해 김정일의 건강이상설과 맞물려 후계자가 대의원 명단에 등장할 것이냐, 내각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비롯해서 권력 엘리트층에 변화가 있을 것이냐 등에 관심이 쏠려 있는 것 같다.

사실 북한체제가 정상적인 공산권 체제라면 외국 언론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공산권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당중앙위원회(약칭 ‘중앙당’)이다. 다시 말해 ‘중앙위원’이 누가 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노동당의 최고의결기구는 당 대회다. 당 대회는 규약상 5년마다 열리게 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북한의 주요 노선이 결정된다. 당 중앙위원은 정위원, 후보위원 등 통상 200 여명으로 구성된다.

5년마다 열리는 당 대회를 대신하여 6개월에 1회 이상 열리는 회의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다. 당 대회에서 선출된 정위원, 후보위원 전원이 참석한다. 여기에서 총비서, 비서, 정치국 상무위원·위원·후보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앙당 부장이 선출된다. 예를 들면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란, 1970년 5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전원 참석한 여덟번째 회의라는 뜻이다. 그리고 당 전원회의를 대신하여 수시로 열리는 회의가 정치국 회의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에서 이런 회의체가 다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김정일 정권은 1980년 6차 당 대회를 연 이후 30년 가까이 당 대회를 열지 않고 있다. 당 대회를 열지 않으니 중앙위원들을 뽑을 수 없고, 중앙위원을 뽑지 않으니 전원회의를 개최할 수 없고 따라서 정치국 위원도 충원되지 않는다. 김일성, 오진우가 죽고 난 다음 정치국 상무위원은 지금까지 김정일 단독이다.

황장엽 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비밀파티에서 술에 취해서 “너, 내일부터 당 중앙위원이야”라고 하면 그 사람은 바로 중앙위원이 된다고 했다. 김정일의 지시가 곧 당 대회의 의결 사항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지가 줄잡아 30년이 됐다.

중국은 당 대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등을 제외하고도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와 정치협상회의(정협)라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비록 유일정당 체제이긴 하지만 ‘민주집중제’라는 표현이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당 대회를 기점으로 해서, 예를 들어 ‘후진타오 2기 체제’ 등의 표현을 쓰고 있으며, 이 표현은 형식과 내용에서 부합하고 있다. 만약 현재의 중국과 지금 북한체제를 비교한다면, 손쉽게 말해 싱가포르와 미얀마(버마)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들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계기로 무슨 ‘김정일 3기 체제 출범’ 운운하는 그릇된 표현을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김정일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즉 정치선전이다. 김정일은 선전을 매우 중시한다. 1964년 당 사업 초기부터 시작하면 40년 넘게 경험을 갖고 있다. 2000년, 2001년 중국 샹하이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두고 ‘천지개벽’ ‘신사고’ 운운하며 한국, 중국에게 마치 개혁개방으로 나갈 것처럼 제스처를 취한 이후 한국 언론은 김정일이 중국에 갈 때마다 ‘북 개혁개방 가능성’ ‘핵포기 가능성’ 등을 보도해왔다. 김정일의 프로파간다에 당한 것이다.

물론 당시와 지금은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언론들의 관심이 또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몰려 가면서 헛다리를 짚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언론 플레이에 능하다는 사실을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2005년 2월 10일 외무성의 ‘핵보유 선언’을 비롯해서 이후 일요일, 휴일, 설 또는 추석 등을 이용하여 대형사건들을 한건씩 터뜨려온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김정일은 미사일 발사 준비 등으로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의 시야를 평양 쪽으로 돌려놓는데 이미 성공했다. 이런 가운데 별것도 아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이용하여 ‘김정일 후계자’ 문제에 관심을 끌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정일의 프로파간다 시나리오를 한번 써본다면, 요즘 주목받는 3남 김정운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등록하고, 그것도 평양이 아니라 개방의 전초기지처럼 인식되어 버린 신의주에 등록하도록 하여, ‘새별 장군’ 김정운이 후계자로 내정되었음을 암시하여 북한 내부적으로는 이 ‘새별 장군’을 2012년 경제대국(강성대국 완성)으로 가는 ‘희망봉’으로 포장하는 동시에, 한국 중국 등 주변국에 대해서는 ‘우리는 개방으로 간다’는 제스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김정일은 미사일을 발사하여 한반도 주변에 긴장을 최고치로 끌어올리고 이후 적절한 시점부터 미국과 협상단계로 진입하여 한반도평화체제, 미북수교, 조선반도 비핵화 및 미북간 핵군축 협상시 핵폐기 용의 등을 흘리며 ‘평화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은 미국과 중국, 필요에 따라 고압적 자세에서 일본과 상대하고,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철저히 압박하고 배제하는 전술을 쓰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경우 김정일은 남한 내에서 ‘북한과 협상을 시도하라’는 구(舊) 햇볕파의 목소리를 높여주며 이명박 정부와 남한사회를 흔들어댈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93~94년 이후 지금까지 김정일이 되풀이해온 군사긴장고조 전략과 공통성이 많지만, 크게 다른 점은 김정운이 ‘대의원’에 등록했다면 ‘후계자’로 암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정운이 후계자로 내외에 암시되었다고 해서 김정일 정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거나, 개방으로 가거나, 핵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김정운 후계자 내정 카드 역시 어디까지나 김정일이 두는 ‘바둑’일 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상 간단한 김정일의 프로파간다 시나리오가 내심 ‘소설’이기를 바라고, 또 이번에는 김정일이 원하는 통미봉남, 남한 내부 흔들기 전술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한국 언론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만약 김정운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등록했다 하더라도 이를 호들갑스럽게 다루어 결과적으로 김정일의 페이스에 끌려가는 일은 자제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사 김정운이 ‘후계자 내정’으로 부각된다 하더라도 우리 언론은 먼저 ‘북한 정권 또 세습이냐?’ ‘3대 세습, 북한 주민이 원하지 않는다’는 논조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론’(正論)이다. 흥미 위주 기사는 그 다음이다. 언론에서 주종(主從)이 바뀌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은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실로 역사적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정말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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