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5차 회의에서 1998년 김정일 시대에 폐지했던 외교위원회를 19년 만에 부활시키면서 외교 고립 탈피를 위한 포석 마련에 나섰다. 예상됐던 핵·경제 병진노선에 대한 언급이나 관련한 대외 메시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대외 선전매체를 통해 ‘(미국과) 전쟁도 불사할 것’이란 위협을 내놓았던 것에 비하면, 이번 최고인민회의는 치밀하게 강도를 조절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압박이 강화될 조짐이 보이자, 북한이 이에 ‘맞불’을 놓는 대신 유화책으로 대외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북한이 조만간 6차 핵실험 등 대형 도발에 나설 것이란 기존의 관측에도 물음표가 달리고 있다. 일찍이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김일성 생일(4·15)이나 인민군 창건일(4·25)을 계기로 도발을 감행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 바 있다.
이와 관련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12일 데일리NK에 “어느 정도 선언적으로나마 핵·경제 병진노선을 이야기할 것 같았는데, 그런 발언도 없는 것을 보면 외부 압력을 많이 고려한 것 같다”면서 “아무래도 미중 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강압 조치나 중국의 북핵 억지 역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게 북한 측에게도 전달된 게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조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아직 대북정책을 명확하게 확정한 건 아니지만, 북한이 고강도 도발을 할 경우 선제타격을 포함한 강경 조치가 검토될 수도 있지 않나. 중국도 쉽게 용인하긴 어려울 것”이라면서 “특히 현 시점에서 북한의 6차 핵실험은 단순히 ‘추가 핵실험’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임계점을 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북한도 치밀하게 강도 조절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도 “김정은도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긴 하지만, 북한 입장에선 트럼프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될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일 것”이라면서 “미국과의 대화나 협상도 해야 하는 과제가 있기 때문에 북한도 당장 핵실험에 나서기 보단 조금 더 관망하는 자세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미국과 중국 외에도 동남아 등 기존 우방국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한 포석이란 분석도 있다. 최근 김정남 암살 사건이나 미사일 발사 등으로 우방국들까지 북한에 등을 돌릴 조짐이 보이자, 북한으로선 핵개발만큼이나 대외 관계 개선에도 힘을 쏟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임 교수는 “현재 북한은 대북제재로 인해 전 세계 어디에서도 외교를 작동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렸다”면서 ”외교위원회가 제재 돌파구를 찾는 역할을 맡아 외교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전략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덕행 통일부 대변인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은 핵개발이란 목표도 있지만, 대외관계 개선이나 개방, 친선 등 (핵개발과) 상반되는 목표도 추구하고 있다”면서 “현 시점에서 핵이 아닌 다른 목표에도 관심을 갖는 게 아닌가 하는 면에서 주목된다”고 밝혔다.
다만 최고인민회의가 본래 예산 심의 등 국회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회의 내용만으로 북한의 대외 기조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이 대변인은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남·대외 메시지가 안 나온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 “특히 4월이 북한에게 굉장히 중요한 달이기 때문에, 앞으로 북한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은 ‘당과 국가의 최고위 추대 5주년 회의’ 중앙보고대회에서 ‘북한이 동방의 핵 강국, 로켓 강국이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면서 “대외관계에도 관심을 쏟겠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핵과 로켓 개발도 추진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북한이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에 다시 등장한 외교위원회는 1992년 북한 헌법에 처음 명시됐다가, 1998년 헌법개정 과정에서 삭제된 바 있다. 통일부는 북한 매체에서 언급된 사례 등으로 볼 때 외교위원회가 1998년까지 지속 활동했으나, 그 이후엔 사실상 폐지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선 리수용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외교위원회 위원장으로 하고, 리용남 내각부총리와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 김정숙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김동선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영원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 비서를 위원으로 했다.
이 중 리수용은 30년간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외교무대서 활약한 베테랑 외교관으로 꼽히며, 리용남은 베이징외국어대학 출신의 대외 경협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리선권은 2006년 10월 남북 군사실무회담 제2차 수석대표 접촉 당시 참석한 바 있다. 김계관은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를 역임할 당시 9·19 공동성명과 10·3합의 등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미국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