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집단체조 보면서 박수치고 웃지말라

▲ 북한의 열병식 장면 ⓒ연합

<4.25여관>에 입소하자 훈련대오의 지휘체계도 개편됐다. 우리대학 행정과장이 우리 종대(한 대학이 1개 종대를 구성) 총책임자로 임명되었고, 대학당위원회 부원 1명, 대학 보위원 1명, 후방책임자1명, 대학진료소 의사 1명, 대학 청년동맹일꾼 1명, 생활지도교원 1명 등이 종대 간부로 임명되었다. 300명이 안 되는 훈련 학생들을 위해 13명의 교원과 15명의 간부들이 파견된 것이다. 전편으로 바로가기

열병식 행사에 참가하는 종대는 군악단을 제외하고 총 50개가 넘었다. 생활도 더 규칙적이고 훈련도 더 강해졌다. 4.25여관에는 김일성광장을 그대로 모방한 주석단과 훈련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전체 종대가 참가하는 종합훈련을 진행했다. 50개가 넘는 종대들이 실전과 똑같은 순서대로 훈련을 벌이는 것이다. 종합훈련은 조선인민군 대좌가 집행했는데 평양에서 벌어진 역대 열병식은 그가 모두 지도한 작품이라고 했다.

매 횡대들에서 발차기를 제일 못하는 사람들을 각 종대의 제일 마지막 25번 자리에 세웠다. 그 자리는 ‘후보자리’이다. 종대마다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한 인원공백에 대비하기 위해 ‘후보생’을 두게 되는데, 후보가 되면 훈련은 같이 하면서도 당일 행사에는 참가하지 못한다.

그 후보자리가 훈련생들을 다그치는데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훈련 지도원들은 훈련생들의 훈련태도가 조금이라도 불량해 보이면 ‘후보자리’로 내쫓겠다며 으르렁거렸다. 1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고도 정작 김일성광장 앞에 서지도 못한다는 것은 모든 훈련생들에게는 ‘죽음’처럼 느껴지는 위협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나도 훈련이 힘들 때면 ‘미국 놈들 미사일에 맞아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순간적인 충동을 느꼈지만, 후보자리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항상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훈련기간 가족면회 일체 금지

4.25여관에서의 생활은 모두 군대생활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새벽 기상과 더불어 모포 각 잡기와 백포정돈, 대열검열, 독보, 식사, 훈련, 청소점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군대식이었다. 다른 것보다 모포 각 잡는 일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제대로 각을 잡지 못하면 지도원들이 개인 물건을 모두 뒤 엎어놓고 사람을 달달 볶았다.

매주 일요일 오후에는 종합훈련이 없었다. 하지만 종대간의 경쟁심 때문에 종대 훈련지도 교원들은 훈련을 계속 시킨다. 열병식 훈련 총지휘부에서도 그것을 알지만 못 본 척 한다. 교원들은 “(훈련장 바닥에) 찰떡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콘크리트 바닥이 반들반들 해질 정도까지) 밀라!(발차기 연습을 하라)”고 말했다.

4.25여관에서 훈련하는 기간 동안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면회는 일체 금지된다. 물론 돈 이 있거나 연줄이 있는 훈련생들은 언제든지 부모들을 만날 수 있었다.

4.25여관에서는 열병식 훈련만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생들을 사상적으로 무장 시키기 위해 별의별 정치행사를 다 벌인다. 한번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노래를 가지고 50개가 넘는 종대 전체가 합창 경연대회를 벌이기도 했다. 한자리에서 50번이나 넘게 같은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리웠던 장군님도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또한 종대별로 ‘사회주의 경쟁’을 조직했는데, 그 경연에서 1등을 해보려고 우리 종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모자이크 벽화 정성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행사 당일이 다가오면서 제일 강조하는 훈련은 ‘횡렬 맞추기’와 ‘사선 맞추기’였다. 출발 신호를 받으면 1사선을 기준으로 대열을 맞추어 나가다가 주석단 앞을 지날 때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며 최고조 높이로 발차기를 해야 한다. 그 횡렬이 미세하게나마 흔들리면 그 사람을 잡아내서 사상투쟁 무대에 올려 세워 온갖 모욕을 다 주었다. 우리 같은 대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해도 군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강건군관학교 종대나 김정숙 해군대학 종대는 전체 종대 중 최고의 일사불란함을 보여줬다.

“장군님 사랑 보답 위해 행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자”

종합훈련은 겨울을 끼고 진행되기 때문에 훈련장에 눈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눈이 오면 전체종대가 동원되어 눈을 치우곤 했는데, 그때 우리는 “미국 놈들 다음으로 미운 것이 바로 눈(雪)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행사 두 달 전부터는 열차를 타고 김일성 광장에 나가 실전훈련을 벌였다. 그때마다 길옆에는 종대 안에서 자식이나 형제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훈련을 할 때 마다 김일성광장을 봉쇄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자리에서 찾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행사 당일이 다가오자 훈련 참가자 전체에게 행사복과 신발, 허리띠가 배급됐다. ‘열병식 기념메달’도 수여됐다. 그리고 “이러한 장군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행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자”는 안건으로 각 종대 별 결의모임을 진행했다.

최종 실전훈련이 시작되면서 훈련생의 고생은 더욱 커졌다. 발 찍는 소리를 더욱 크게 하려고 신발 바닥에 말발굽처럼 징을 박았는데 국가에 나누어준 신발이 어찌나 형편없던지 징을 고정하는 못 끝이 솟아올라 훈련생들의 발바닥을 찌른 것이었다. 우리 횡대 25명 중에 못 끝이 발을 괴롭히지 않은 사람이 불과 두 명뿐이었다.

드디어 행사 당일이 다가왔다. 행사 당일에는 허리띠의 버클과 단추를 비롯한 금속제품을 닦지 못하게 했다. 금속제품에 광이 날 경우 햇빛에 반사되어 장군님의 시력에 해를 주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행사 전날 밤에 김일성 광장에서 훈련으로 밤을 보내고 새벽 3시 주먹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아침이 되자 5호총국 일꾼들이 와서 행사 참가증을 확인했다. 군악단 입장식과 함께 행사장에 진출하고 나서 오전 9시까지 행사개시를 기다렸다. 마이크로 증폭되어 들려오는 초침 소리 때문에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행사 전에 안정제 주사를 놔주고, 구심환도 세 알씩 입안에 넣어 주었지만 기절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1분 40초를 위해 1년을 다 바쳐

드디어 정각 9시, 1호 환영곡(김정일이 등장할 때 나오는 음악) 소리가 울리자 온 종대가 목청껏 만세를 외치며 울었다.

필자는 그 당시 잠깐 몇 분 동안이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필자 머리 속은 하얗게 변했고, 나도 모르게 발과 손이 올라갔던 느낌이다. 필자가 정말 주석단 앞을 지난 것이 사실인지, 꿈을 꾸었는지 지금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속으로 “일생에 한번뿐일지도 모르는데, 장군님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리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행사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단 1분 40초였다. 그 1분 40초를 위해 1년을 다 받쳤는데도 필자의 머리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4.25여관으로 되돌아오는 열차에서는 모든 훈련생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도 나처럼 허망한 1분 40초를 위해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던 지난 1년의 시간이 서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우리 대학생들은 평양시민들의 연도환영을 받으며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향했다.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광장의 길이는 총 415m이다. 이것은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해서 설계된 것이다.

죽은 김일성 시신을 위해서도 열병식 가져

우리 대학생 종대들은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또 한번 열병식을 진행하고 나서야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1분 40초 동안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수 만 명이 광적인 행사를 벌였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의 무덤을 찾아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외치는 것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때 정말로 훈련이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열병식 훈련기간 누구나 다 “충성의 일기”를 써서 검열을 받아야 한다. 필자가 나중에 그 일기장을 정리해보니 4.25여관에 입소한 후 6개월 동안 김일성 광장을 관통한 연습 횟수가 무려 556번이었다. 결국 우리는 1분 40초를 위해 1년의 시간을 바쳤으며, 1번의 행진을 위해 556번 관통을 연습을 벌였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학교에서는 열병식 참가 학생들에게 표창휴가를 주고 고향집에 가서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한때 공화국 정부에서 집단체조 ‘아리랑’에 참가 했던 사람들에게 천연색 텔레비전을 한 대씩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열병식이 열리게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열병식 참가자들이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열병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동네사람들이 부모님께 “그 집 아들은 무슨 선물을 받아왔나?”고 캐묻는 난처한 상황이 이어졌다. 열병식에 참가하고 국가에서 받은 선물이라고는 열병식 행사복과 허리띠, 발바닥을 찌르던 신발 정도였다. 그 외에 무릎 관절염과 소화불량 증세를 덤으로 얻었다.

필자는 지금도 대학 신입생 시절의 추억이 하나도 없다. 1년간의 열병식 훈련은 건강하고 튼튼했던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들었다. 건강했던 몸이 굳어가고, 남들보다 우수했던 두뇌는 기계처럼 움직이다가 바보가 되어버렸다. 춥다는 것, 덥다는 것, 배고프다는 것, 몸이 아프다는 것, 졸린다는 것, 오직 몸으로 느끼는 본능에 대한 반응만 남게 되었다. 결국 나에 남은 것은 수치심뿐이었다.

집단체조 보고 박수치지 말라

그러나 그 때 1년간 열병식 훈련을 통해 필자는 사람을 장난감 도구처럼 생각하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으며, 썩어빠진 간부집단의 구린내 나는 뒷모습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필자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 열병식 때문에 지금의 필자가 있게 된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외국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만약 조선의 열병식이나 집단체조나 군중예술 행사를 볼 기회가 생긴다면, 웃고 박수치는 것만은 하지 말아달라. 그 장면은 조선 사람의 피와 눈물을 쥐어짜서 만든 형상이다.

그 장면을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은 재주를 부리는 짐승들의 묘기를 보고 박수를 치는 것과 똑 같은 것이며,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이 나온다면 조선 사람을 더 이상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금은 김정일 독재 때문에 사람구실을 못하고 살지만 우리 조선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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