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민 ‘지하부자’들 제법 늘었네

▲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북한 주민
<사진:Irwin Oostindie>

지금 북한에는 ‘지하부자(地下富者)’들이 많다. 말 그대로 땅 속에 묻혀있는 부자들이다. 돈은 땅 속에 묻어놓고 조용히 꺼내 쓰면서, 겉으로는 절대 돈 있는 티를 내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북한에서는 갑자기 돈을 흥청거리며 쓴다거나 생활이 유족해지면 보안서와 보위부에서 조사를 내려온다. 월급은 얼마인데 가진 것은 얼마이니, 대체 그 불로소득(不勞所得)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캐묻는다. 그래서 든든한 권력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돈이 있어도 있는 티를 낼 수 없다.

‘지하부자’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한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에 있는 모든 탈북자들이 체포와 송환의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지만, 일부는 그 와중에 돈을 벌어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주는, 북한식 표현으로 ‘이악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중국에서 성공한 탈북자 늘어

중국 길림성 **현에서 만난 탈북자 림춘화(여, 31세) 씨는 강원도 고산군 출신으로 올해로 탈북한 지 8년째다. 온 가족이 인민군 군관(장교)이고 당원인 림씨는 호위사령부 타자수로 일하다 위장염으로 군대를 감정 제대했다. 군대 엘리트 집안에서 유일하게 군관이 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진 림씨는 식용 기름개구리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고, 중국에 물건을 사러 들어왔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다행히 총명하고 마음씨 좋은 조선족 남편을 만난 림씨는 남편에게 중국어를 배웠고 과일, 육류, 잡화 등 여러 가지 장사를 해서 크게 성공했다. 요즘은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인터넷에 푹 빠져있는, 탈북자 가운데 보기 드문 ‘성공케이스’다. 슬하의 아들(6세)도 거액의 돈을 주고 중국 호적을 만들어내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림씨는 또한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매년 1~2회씩 중국 인민폐 3,000~5,000원(한국 원화 39~65만 원) 정도를 보내주고 있다. 처음에는 “조국을 배반한 딸년의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던 아버지도 이제는 “그래도 그것이 머리는 똑똑해서 잘 사는고만”하면서, 돈을 보내주는 인편에 ‘건강하게 잘살라’는 안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강원도 고산군에서 그 정도 돈을 가졌으면 최고의 부자일 것”이라고 림씨는 말하며 “절대 돈 있는 행세를 하지 말고 부모님 끼니 걱정 않고 배불리 먹는 것에만 쓰라고 신신당부 했다”고 한다.

남한에서 북한 가족에 1천만 원 송금도

함경남도 함흥군이 고향인 탈북자 김미희(여, 27세) 씨도 매월 중국인민폐 100~300원(한국 원화 1만 3천~4만 원) 정도를 북한에 보내주고 있다. 김씨의 가족들은 그 돈으로 쌀과 해산물 장사를 해서 ‘지하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돈을 부칠 때마다 가족들에게 “중국에서는 이 돈이 큰 돈은 아니지만 조선에서는 큰 돈이다. 절대 ‘드러날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같이 보낸다고 한다.

2000년 한국에 입국하여 현재 경기도 부천시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 김영준(남, 33세) 씨는 지금껏 1천만 원이 넘는 돈을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주었다고 말한다. “굶어 죽느니 중국에 가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두만강을 건넜던 김씨는 이제 북한에 있는 식솔을 먹여 살리는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다. 다음은 김씨와의 문답.

– 어떻게 해서 북한을 탈출하게 되었나?

우리 집은 원래 평안남도 평성시였는데 어느 날 무슨 영문인지 함경북도로 추방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우리 친척들 가운데 소련에 유학 갔다 온 사람이 있는데 아마 그 사람이 반동으로 총살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얼굴도 보지 못한 친척 때문에 최하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식량난으로 굶어 돌아가신 다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북한에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고기에 쌀밥을 먹어볼 것 같지 않았다.

고심하던 끝에 어머니에게는 차마 말을 못하고 여동생에게 “여기(북한)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울면서 “어머니는 내가 잘 모시겠으니, 중국에 가서 제발 붙잡히지 말고 꼭 성공해서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후에 들으니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은 내가 어디 가서 굶어 죽은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상황은 어떤가?

지금까지는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 돼간다. 우리는 북한에서 살 때 항상 째포(재일동포를 이르는 북한의 속어)와 화교들을 제일 부러워했다. 그 사람들은 친척들이 외국에서 돈을 부쳐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국으로 들어와서 진짜 열심히 살았다. 정부에서 준 정착금을 까먹지 않고 저축하면서 열심히 지금까지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집에 부쳐주었다. 북한에서는 아주 큰 돈이다. 어젯밤에도 누이동생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청진에서 으뜸가는 ‘지하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 가족도 제2의 ‘째포’와 화교가 된 것이다.

– 그렇게 돈을 많이 갖고 있어도 아무 탈이 없나?

물론 절대 티를 내면 안 된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우리집에 흑색 TV 한 대를 사놓았다가 인민반장이 고발해 안전부에 불려 다녔던 것을 생각해서 동생에게 절대 좋은 것은 사놓지 말라고 했다. 먹기는 잘 먹되 통일이 되는 날까지 건강하기만 하라고 당부하곤 한다.

– 그럼 그 돈은 전혀 쓸 데가 없는가?

북한엔 사유재산이란 것이 없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람들이 부동산이나 자동차 같은 것들을 사유재산으로 만들고 있다. 법 기관에 돈을 먹이고, 자동차나 집 같은 것을 국가의 명의로 등록하고, 한 달에 세금을 얼마 바치고 자기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아파트와 문화주택도 모두 국가재산이지만 자기들끼리 뒤에서 매매 거래를 하고 국가기관에 ‘교환’이라는 구실을 대고 명의를 변경하는 식으로 한다. 지금 청진에서는 25평형 아파트 한 채에 300만 원(약 3,000달러) 정도 하고, 장마당과 가깝거나 시내 중심의 아파트일수록 고가로 거래된다고 한다.

– 북한에서는 탈북자들이 한국에 나와 사는 것을 모르는가?

내가 없어졌다고 보안서에서 여러 번 조사를 나왔다고 한다. 199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때 보안원들이 대대적인 호구 조사를 했는데 그때 죽은 사람이 너무 많고 행불자(行不者)도 많아,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러 다녔다고 한다.

죽은 걸 보았다는 사람이 세 사람 이상이면 죽었다고 문건을 만들어 놓고, 행방이 묘연하면 행불자로 만든다고 한다. 내 동생이 잘 아는 보안원의 말에 의하면 1990년대에 행방불명된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들이 중국으로 갔는지, 남조선으로 갔는지, 아니면 귀신도 모르게 죽었는지 몰라 당국에서도 골칫거리인 것 같다.

중국으로 갔다는 사람들은 ‘중국으로 도주’라고 명기하고, 한국으로 갔다는 사람들도 ‘남조선으로 도주’라고 문건에 남긴다. 그런데 한국으로 갔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이전처럼 엄하게 추방시키거나 수용소로 끌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 처리하면 적수들만 늘어나니 북한당국도 처리를 느슨하게 하는 모양이다.

북한당국은 한국이나 중국으로 간 사람들을 내적으로는 반역자(反逆者)로 규정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실수로 넘어간 사람’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통일이 되면 ‘교양 개조해서 쓸 사람’들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중국 옌지 = 김영진 특파원 kyj@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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