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민이 김일성 바로 알 때 진정한 해방 온다

김정일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원망과 분노는 상상 이상이다. 식량난 이전에는 일반 주민들이 김정일에 대해 직접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촘촘한 감시체제와 탄압도 있었지만 우상화 작업과 외부 정보 차단으로 북한은 지상낙원이고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위대한 영도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중반 대아사 기간까지 지속됐다. 당시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장군님의 만수무강을 빈다”고 말할 정도로 사상적으로 김부자에 예속된 상태였다.


김부자에 대한 절대 충성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식량난이 만성화 돼 주민들의 식량난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다. 탈북자가 증가하고 북중교역이 활성화 되면서 외부 정보가 본격적으로 유입됐다. 정확한 수치를 내놓기는 어렵지만 주민들과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면 2000년대 중반에 와서야 주민 절반 정도가 외부 사회와 북한을 비교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중국에서 만난 한 평양 주민은 “일개 기업소에서 절반 정도가 생각이 깨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북한 전역에서 시장이 활발해지고 외부 정보와 드라마가 유입되면서 200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김정일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비등해졌다. 이것이 2009년 화폐개혁과 다음해 김정은 3대세습 공식화를 거치면서 사실상 반(反)김정일 의식으로 굳어져갔다. 데일리NK 중국 선양 특파원이 전해온 바에 따르면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날 상황” 또는 “보안원 뒤통수까지 까는 세상에 더 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있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내부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 중 열에 일곱은 김정일을 싫어하고, 열에 여덟은 김정은을 경험도 없는 햇내기라며 무시한다고 한다. 간부 층에서도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않지만 3대세습에 대한 불만 여론이 적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 체제의 3대세습은 북한 주민들의 선택이기 때문에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일부 종북세력의 사고는 망상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 북한 수뇌부에 대한 주민들의 여론은 말 그대로 ‘불만 투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 대상에서 원조 수령 김일성은 조금 비켜나 있다. 탈북자들 중에서도 김일성에 대해서는 김정일과 같은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남한에 와서 김일성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고 나서야 자신이 철저하게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다.


북한 당국이 전하는 김일성에 대한 정보만을 접하는 북한 내부의 주민들은 이런 현상이 더 심할 수밖에 없다. 남한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우상화 교육의 영향으로 김일성은 항일운동과 국가 건설, 미제의 침략(6·25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6·25전쟁의 주범이 김일성이라는 사실은 북한 주민 소수만이 알고 있다. 김일성이 죽자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장군님도 죽는 것을 보니 신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을 정도다.


둘째는 김일성 시대에는 지금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비교적 어렵지 않았고 주민 배급이 정상적이었다. 군부대 배급에서는 고기도 나왔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고 대기근이 시작되자 “김일성 때는 잘 먹지는 못해도 먹는 문제로 이렇게 걱정은 안 했다”는 식의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세 번째로는 김일성의 개인적인 용모를 들 수 있다. 여기에 그가 인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다는 점도 긍정적 인식에 도움이 됐다. 김일성의 후덕한 얼굴과 큰 풍채는 보는 사람에게 긍정적 인상을 준다고 탈북자들은 말한다. 또한 말 끝마다 ‘위민(爲民)’을 앞세우며 주민들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어록을 많이 남겼다. 특히 현지지도가 주민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상징조작 효과를 지녔다.


김일성은 생전에 8천650여일 동안 57만8천km를 이동, 총 2만600여 개 기관을 방문했다. 또한 2008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김일성이 연평균 현지지도를 나간 단위 수나 일수는 김정일의 거의 두배에 이른다. 최근에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강화하고 있지만 군부대 방문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아버지와의 큰 차이점이다.


특히 김일성을 만나본 사람들이 그를 미화하기 위해 쓴 ‘인민들 속에서’라는 책에는 그를 한 번 만났다는 것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많은 사례가 있다. 따라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평생 동안 김일성을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막연한 충성심이 고조됐다.


북한 간부 출신 탈북자는 김일성에 대해 “김정일은 눈 밖에 난 간부나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대했다. 심화조 같은 풍파가 일어나면 무차별하게 처형하고 수용소로 끌고 간다. 그런데 김일성은 결함이 있어도 용서해주는 자비를 베푸는 인상이 강하다. 노 간부들이 ‘수령님 때는 이러지 않았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김일성의 인상을 좋게 해준 일등 공로자는 바로 김정일”이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 중에 납북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김일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과거 종파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쫓겨난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숙청자들과 후세대들이다. 이들은 평생 수용소에서 김일성을 원망했고, 이들과 간접적이나마 연관이 있던 사람들 또한 평생 감시 대상이 되고 일정 직위 이상 승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체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두 번째는 지식인, 인텔리 계층 중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은 것을 큰 과오로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교적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현실을 분석하면서 김일성의 업적과 혁명 역사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평양 출신 탈북자는 “이들은 김일성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머리가 똑똑해 어떻게 해야 출세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요란스럽게 충성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김일성 시대에 사소한 잘못으로라도 감옥에 다녀오거나 추방당한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각종 멸시와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체제를 보는 눈이 생긴다. 그래서 이런 눈을 가지고 돌아온 사람들은 김일성에 대한 원망과 함께 체제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직감하게 된다고 한다. 특히 평양에서 산골 오지로 추방된 사람들의 불만은 매우 크다.


김일성 우상화는 사실 김정일 시대에 정점을 찍었다. 탈북자들은 “김일성은 죽어서도 유리관에 누워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故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김일성은 독재자로서 많은 잘못을 했지만 가장 큰 잘못은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이다. 그는 늙어서 아들에게 시를 써서 받칠 정도로 자식 눈치나 보는 속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일성은 애초 좌파 민족주의자였다.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에 입각한 나라를 건설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희생자를 낳고 종파투쟁을 거치면서 권력욕에 빠진 희대의 독재자로 전락했다. 결국 김일성은 자신의 절대권력을 바탕으로 김 씨 가문 세습 수령독재의 길을 텄다.


또한 국가를 계급투쟁의 장으로 몰고가 지식인과 인텔리를 경시했다. 북한은 1970년대 이후 생산력의 정체를 겪었고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기본적인 생산시스템마저 붕괴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생산의 기본동력으로 하는 국가는 제갈공명이 와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여기에 그와 아들 김정일의 무능이 겹치면서 북한은 기아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은 국가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신세가 됐다.


북한 주민들도 때가 오면 김일성의 실체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죽은 자를 비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김일성을 딛고 일어설 때 북한 주민들은 진정으로 사상적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의 적인 아들 김정일과 손자 김정은을 먼저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과 손을 잡을 때를 대비해 그들의 의식체계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좋은 선행 학습이 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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