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민은 김일성을 이렇게 생각한다

북한 사람이라면 오늘 아침, 조건 반사적으로 김일성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을 배우게 되고, 김일성 초상화에 인사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환경변화가 너무 큰 탓인지 한국에 온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지만 북한에서 살았던 시간이 자꾸만 가물가물해진다. 기자와 같은 탈북 출신들은 ‘내가 벌써 남쪽 사람이 다됐나’ 하는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생활이 아무리 북쪽의 기억을 털어내는 속도가 빠르다 해도 4월 15일 태양절(김일성 생일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뜬 순간 김일성의 얼굴이 퍼뜩 떠오르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무의식 중에도 김일성을 연상시키는 단어는 ‘수령님’이다. 김일성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뒤따라붙는 ‘수령님’이라는 세글자. 그 잔영을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는 내자신이 괜스리 불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의 김일성 생일 잔치를 보는 한국 사람들은 “하느님도 아닌 김일성이, 그것도 죽은 사람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국에 와서 들어보니 많은 분들이 1994년 김일성 사망당시 통곡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심각한 이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북한 체제에 대한 논리적 판단력이 부족한 북한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김일성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크지 않다.

김일성 사망 후 몰아닥친 대기근의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김일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수령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북한 사람들의 보통 생각이다.

1970년대 김일성이 부자세습을 결정하고, 80년 자신과 김정일 공동 집권기를 지나서 90년대부터는 김정일의 눈치를 보고 지낼 정도였다는 말을 여기서 알게 됐다. 오죽했으면 김정일을 찬양하는 ‘송시’까지 지어 보냈을까. 김일성도 사실은 그런 독재자에 불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저녁 북한의 지인과 전화 통화를 가졌다. 양강도 갑산군에서는 쌀 1kg에 북한 돈 2,100원 이란다. 돼지고기가 1kg에 4,500원, 옥수수는 1kg에 800원이었다.

지인은 “명절이라면서 배급주는 것도 별로 없고, 봄철이 되니 다시 식량가격만 오른다”고 푸념했다. 북한에서 민족최대의 명절이라고 선전하는 4월 15일이 되면 당 간부든 평백성이든, 돈이 있든 없든, 북한 주민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정치’를 거론하게 된다.

지인은 “고난의 행군(식량난) 전에는 4.15가 되면 그래도 집집마다 떡치는 소리에 지지고 볶는 냄새가 동네를 진동했는데 지금은 어느 집을 봐도 고기 한 점 볶는 집이 없다”고 말했다.

“돈깨나 있다는 집들도 괜히 잘 사는 티를 냈다가 보위부 검열에 걸릴까봐 별로 요란하게 보내지 않는다. 국가에서는 숨도 못 쉬게 하니, 그래도 수령님 살아계실 때 같은 시절이 다시 오면 좋지 않겠는가”라며 한숨을 짓는다.

기자와 한 동네에 살고 있는 탈북자 김 씨(55세, 2009년 2월 입국)도 “지금 생각해보면 김일성이 정치할 때 잘 살지는 못해도 먹는 걱정은 이렇게 안했던 것 같다. 배급도 정상 공급 했고 상점에는 비록 좋지는 않았지만 북한에서 생산한 물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국이나 잘 사는 나라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때 당시의 수준으로 보면 괜찮았다”면서 “정상적인 배급으로 하루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었고, 신발이나 옷 등 생활필수품들도 북한에서 생산한 것으로 떨구지(떨어지지) 않고 쓸 수 있었다”고 추억했다.

김 씨는 “지금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휘두르며 대외관계에서도 독선을 고집하지만 김일성은 정치폭도 넓었고 또 오래전부터 중국과 구소련과의 유대도 있어 대외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면서 “김정일은 성격이나 정치 업적에서 아버지의 발바닥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오늘날 처럼 빌어먹는 국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렇다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하거나 개인능력 계발을 맘껏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만족하는 수준이었다.

북한에서는 눈과 귀가 있어도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국가 살림이 바닥을 드러내서야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가 때마침 주변 사회주의국가가 붕괴하고 김일성이 죽은 다음에 찾아왔다.

북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가족 중에 한사람이 굶다가 쓰러지고 나서야 ‘정말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1995년부터 식량난이 본격화 됐을 때도 ‘설마 굶겨 죽이지는 않겠지’ 하다가 하나씩 드러눕고 어떤 대책도 없이 수 없이 쓰러져갔다.

김일성이 죽고 나자 김정일은 전국의 마을마다 ‘영생탑’을 세웠다. 그 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공통적으로 적혀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이러니 하게도 김정일은 아버지의 정치적 선전 효과 뒤에 숨어서 자신의 폭정(暴政)을 정당화 시킨다. 영원한 수령의 아들로 선택된 불세출의 명장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충성과 효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갈 것 같지는 않다.

현재 김일성이 그나마 나았다는 평가를 하지만 결국 김일성의 실체도 이제 다 밝혀질 것이다. 또한 자식 잘 못 키운 부모가 세상의 칭송을 얻은 예는 없었다. 게다가 그 권력이 3대 세습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죽은 부모까지 욕보이게 될 김정일의 불효는 이제 그 종착점이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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