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정치범수용소 책임 김정일에만 물을 수 있나

28일로 김정일 장례기간이 끝났습니다. 그는 화려한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김정일이라는 인간에 대해 사회적 정리를 잘 하고 있는 걸까요? 정부 차원의 조문은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정일은 평가가 아닌 심판의 대상입니다만, 북한에서 40년 정도 기자 생활을 해온 제가 보는 김정일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보탬이 돼볼까 합니다.


먼저 북한 주민의 인간적 권리를 박탈한 문제, 즉 인권부터 거론해 보겠습니다. 외부 사회는 북한의 인권과 핵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논할 때 항상 먼저 거론되는 곳이 있습니다. 20만 명 이상을 가둬놓고 ‘연좌죄(연좌제)’를 물어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무참히 죽어가야 하는 곳, 바로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제가 북한에서 알고 있는 자료로는 첫 정치범 수용소의 모체가 1958년 개천에 설립된 ‘6.25 전범자 구류소’, 일명 ‘개천관리구역’입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이름은 아닙니다. 당 시대를 경험한 어르신들이 해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정확한 이름은 모릅니다.


북한은 전쟁이 끝나고 그 여진이 가라앉은 1958년부터 6.25전쟁 당시 치안대에 가담했거나 북한 주민들에 대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민재판을 받았고, 지켜 본 가족들과 함께 ‘연좌죄’로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언론들에 자주 거론되는 ‘개천수용소’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이 개천에 첫 수용소를 만든 것은 과거 소련이 시베리아에 만들어 놓은 정치범수용소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25전쟁 당시 ‘치안대’ 가담자, 만행자들을 색출하는 사업에 동원됐던 주민에 따르면 이들 ‘전범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개천관리구역’에 들어간 것이 1958년 10월 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달도 못 돼 그곳에 1956년 종파사건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이 들어왔고 남로당 간부였던 이승엽의 아내와 외동딸도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후 박금철을 비롯한 ‘갑산, 혜산파 숙청사건’과 ‘김창봉 군벌주의 세력 숙청사건’ ‘남로당 숙청사건’을 통해 수많은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계속 수용소에 들어오면서 개천수용소는 둘로 갈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알려진 개천 12호와 15호 수용소입니다.


특히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되고 노동당 선전선동부분을 담당했던 1970년대에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걸어 수많은 주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로 갔습니다. 정말 하찮은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토대나 과거 전력 때문에 재조사를 받아 끌려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유일사상과 빗나간 말을 상대방이 하도록 유도해 죄를 씌우고 다니는 간부들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이 부분에 관여했던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958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은 대략 100만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용된 사람들이 늘어나자 북한은 수용소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한편 지은 죄에 따라 수용된 사람들을 분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실례로 ‘회령 22호 관리소’에 갇힌 가족들의 경우 이들은 모두 가문 중에 ‘간첩죄’를 지은 사람이 있어 ‘연좌죄’로 구금된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북한이 러시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김일(박덕산) 부주석의 아들 박남기의 경우 그 가족들이 모두 ‘회령 22호 관리소’에 구금된 것으로 소문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범수용소는 1970년대 말까지 절정을 이루었으나 후계구도가 완비되고 김일성에 의한 ‘유일적 사상체계’, 김정일에 의한 ‘유일적 지도체계’가 완비된 1980년대부터는 수감인원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구속된 사람들은 대다수 간첩이나 남로당원, 조총련계 소속들이라기보다 ‘말 반동’으로 알려진 일반 주민들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말을 잘 못해 반동누명을 쓴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말 반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범수용소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989년부터였습니다. 당시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요해하던 김정일이 ‘말 반동’의 의미에 대해 따지기 시작했고 뭔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죠.


그때까지 정치범수용소는 일단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말 반동’은 본심이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얼마든지 교양 개조할 사람들을 왜 가두었냐고 비판하면서 정치범수용소에 구속된 사람들 중 ‘말 반동’이나 일부 개조될 사람들은 일반 감옥과 같이 혁명화 구역을 설정해 실형제(연한제)를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조치로 처음 정치범 수용소를 벗어난 사람들이 강철환 씨와 같은 수용소 체험자들이었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치범수용소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일부가 북한 정권에 대한 혐오감으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했으며 이로 인하여 정치범수용소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치범수용소 자체를 유지하는 반인륜적인 북한 정권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거론할 때 과연 김정일의 죄가 더 클 가요, 아니면 김일성이 지은 죄가 더 클까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김정일이 김일성이 지은 죄를 뒤집어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김정일이 정치범수용소에 연한제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슈로 부각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수용소의 설계자인 김일성을 제외하고 김정일에게만 정치범수용소의 책임이 집중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