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정치범수용소, 공개처형시 가족들 앞줄에서 돌 던지게 해”

진행 :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2015년 유엔은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도 2016년 탈북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은 통일 후 인권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어떤 인권문제가 있는지 이야기해 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는 가해자들이 인권침해 행위를 중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20대 청춘까지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던 박주용님을 모셔 수용소 내 인권침해 실태, 특히 공개처형과 강제노동 등 생활 실태 등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먼저 공개처형 실태에 관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 박주용씨 안녕하세요. 태어난 곳이 어디시죠?

21호 수용소에요. 21호 수용소에서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돼 18호 수용소로 옮겨갔습니다. 삼촌죄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 때 옮겨가 18호 수용소에서 언제까지 사신 건가요?

수용소를 탈출하기 직전인 23살까지 살았죠.

– 18호 수용소는 정치범들이 들어가는 수용소인데요, 언젠가부터 해제민이라고 해 다르게 분류돼 사셨다고요?

네, 97년부터 해제민과 이주민 분류를 심하게 했어요. 저는 2003년부터 해제민으로 돼 살았죠.

– 엄밀히 말하면 정치범에서 해제가 된 것임에도 계속해서 수용소 내에서 살았던 건데요, 그때가 2003년이니까 박주용씨가 17살 정도 됐겠군요. 그 전까지는 정치범으로 18소 관리소에 수용돼 살았고, 그 이후로는 해제민이 됐음에도 계속해서 수용소 생활을 한 것이군요.

그렇죠. 학교에 가서 ‘해제민’이라는 말을 떳떳하게 듣는것 말고는 바뀐 게 없었습니다.

– 당시 18호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친척이나 형제, 알지도 못하는 팔촌의 죄 때문에 (연좌제로) 들어와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죠.

– 수용소 내에서 공개처형이 이뤄진다고 하는데요, 박주용씨 직접 보신 적 있나요?

그냥 봤다는 정도가 아니고 직접 많이 봤습니다. 공개처형을 한다고 (처형자의) 사진을 걸어 둡니다. 거기에는 (처형자의) 나이, 키 등도 같이 적어 둬요. 여기(한국)은 전봇대 같은 데에 (방을) 붙여놓는데 거기(북한)에선 집 앞(벽)에 붙여 둡니다. 이런 사람을 몇시에, 어디에서 공개처형을 할 것이니 일 나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나오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침 7시에 공개처형 한다면 이 시간에 근무하는 사람 외에는 전부 나와서 보라는 것이죠.

저희 어머니는 어린 저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저희를 숨겨 놓곤 했습니다. (저희를) 방에 두면 인민반장이 돌아다니다 애가 있는걸 알게 되니까 (안되고). 저희 집 마루 밑에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저희를 숨겨뒀어요. 공개총살이 끝나고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는 거죠. (숨어있던 곳은)연탄 냄새가 덜 나서 그때 당시에는 뭐 모를 때라 엄마가 숨어 있으라 하니 숨어있는 거죠. 거기서 나가면 잡혀가고 혼나게 된다는 걸 아니까 숨어 있다가, 엄마 오면 문열어주고 그때서야 나오곤 했어요.

그러다 제가 성장해서 공개총살 현장에 나갔습니다. 그때가 9살, 10살 즈음 됐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제일 앞에 앉혀요. 그 다음 순서대로 큰애들을 앉히죠. 버드나무에 나무 갑판 하나 박아 두고 (처형자의) 손을 묶고, 죄목을 알려줍니다. 이 사람 죄는 평안남도 북창군 봉창리 (18호 수용소)에서 탈출하려다 직동 처소에서 잡혔는데, 탈출하려고 했다는 걸 인정 안했다고. 그래서 이 사람을 교화소에 보냈는데 교화생활을 하던 중 반성을 안 해, 결국 처형에 처한다고 하더라고요. 장군님 방침에 어긋났으니 처형해도 마땅하다며, 인민의 이름으로 무참히 처형하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고 보고 있던 사람들이 돌을 막 던지고, 당시 장마철이라 강가에 떠내려 온 각목으로 때리기도 하고요.

당시 저에게 처참했죠. 꼭 봐야하나 싶었고요. 또 들었던 생각이 ‘나도 죄를 지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더욱 안타까웠던 게 총살하는 사람의  가족을 맨 앞에 두고, 가족이 제일 먼저 돌로 던지게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돌을 던지기 전에 가족이 먼저 돌을 던지게 합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장군님의 방침에 어긋나게 행동했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이런걸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거죠. 그렇게 돌로 맞다가 숨만 겨우 붙어있는 때 그제서야 총으로 쏴 죽이는 겁니다.

– 사람들의 반응은 다 달랐겠습니다만, 대체로 어떤 반응인가요?

북한에선 항상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요.) 아버지 말씀에 어긋났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한 80~90퍼센트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처럼 (그곳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저희 부모님처럼 바깥 생활을 하다 들어온 사람은 또 다르게 생각했을 거라 봐요.

또 (드는 생각이) 한창 꽃피어날 어린아이인데, 장군님이 말로는 ‘꽃 같은 어린아이’라 하면서 왜 이런 처참한 걸 어린아이가 보게 하는지 싶었고요.

– 또 내가 저 상황이 되면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생기고 했군요. 공개처형에 보통 몇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나요?

몇 명이라고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일 나가는 사람, 저희 부모님처럼 어린 아이들을 숨겨놓는 경우, 몸이 불편해 걷지 못해서 못 나오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략 천명은 더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도로를 꽉 메울 정도로요.

먼저 돌을 던진 사람이 뒤로 오고 그 다음 사람이 또 나와 돌을 던지는 식으로 반복돼요. 한 사람이 공개 처형된다 하면 몇 천 명의 돌을 맞는 거죠. 던지는 사람의 힘에 따라 한번 맞아 살이 뜯겨 나가는 정도가 다르지만. 몸이 (많이 맞아) 부어있기 때문에 뾰족한 돌을 맞는 경우 살에 박혀서 안 나오기도 하고요. 숨만 붙어있는 거라고 봐야 하죠. 그렇게 돌을 맞다 (총을 맞기도 전에) 죽는 경우도 있고요.

– 만일 특별히 일이 없는데도 공개처형에 나가지 않은 것이 발각되면 어떤 불이익을 받나요?

불이익은 당연히 있습니다. 김정일 말을 거역했다는 걸로 해서 말이죠. 그 사람은 단련대나 무보수 노동에 가게 돼요. (공개처형장에 나가지 않은 것이 발각되면) 인민반에서 감싸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인민반장이 지도반장에 가서 이야기하고, 지도반장이 보안원에 이르게 되면, 이 사람은 성실히 일도 안하고 공개처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하여 처벌을 받게 됩니다.

– (박주용씨) 어머님이 처음에는 공개처형장에 못 나가게 마루 밑에 숨겨두곤 하다가 박주용씨가 처음으로 공개처형을 목격한 게 9살, 10살 때에요. 얼마나 어린 나이부터 공개처형 현장에 나가게 되나요?

인민학교 1학년부터는 다 공개처형 현장에 나갔던 것으로 기억해요. 공개처형한다고 하면 학교 선생님이 (반 학생) 전부를 데리고 같이 나가는 거죠.

– 17살 때까지는 정치범(18호 수용소 내에서는 ‘이주민’이라고 부름), 그 이후로는 해제민으로 살았는데 해제민 구역에서도 처형이 이뤄지나요?

공개처형은 한 장소에서 하기 때문에 해제민, 이주민을 다 만날 수 있습니다.

– 수용소 내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용소에서 생활했는데, 그 동안 대략 몇 번 정도 공개처형을 목격하셨나요?

총 몇 번이라고 이야기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 오는 걸 성공 못했으면 저도 범죄자로 돼 끌려갔을 겁니다. 보통 탈북민들이 태국과 같은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올 때 10명 혹은 그 이상씩 함께 이동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한 번에 걸려 오게 되면 같이 처형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한 번에 진행하지 않고, 1일에서 10일 사이에 몇 명, 10일에서 20일 사이에 몇 명, 이런 식으로 진행합니다. 김정일 정권들어 사회가 혼잡해졌습니다. 그때는 한 달에 두세 명도 총살하고, 한 2~3년은 그렇게 꾸준하게 공개처형이 이뤄졌던 것 같아요. 그러다 사람들이  공개처형이 두려워 자중하게 됐죠.

– 공개처형이 일 년에 한번씩 있는 특별한 게 아니고 일상적으로 있는, 한 달에 두세 번씩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군요. 가슴 아픈 이야기이겠습니다만, 그동안 봤던 공개처형 가운데 기억이 나는 사례가 있나요?

당시에는 그분이 죽는 게 가슴 아픈 줄 몰랐어요. 공개처형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크게 못 느꼈는데. (그 사람은) 평안북도 구장에서 혁명화로 온 사람이었어요. 혼자 사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학습시키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지내던 사람이었어요. 수용소 바깥 생활을 하다 온 사람이죠. 수용소에 와서 석탄을 캐다가 다리를 다쳐 심하게 절었어요. 그러다 그 사람이 수용소를 탈출하려고 했던 겁니다.

시도를 했는데 중간에 잡힌 거예요. 나가려고 한 거냐? 물어봐도 그 사람은 구장에 있는 가족, 친척들이 다칠 것을 생각해 입을 아주 닫았던 모양이에요. 그러자 교화형에 처하게 됐죠. 교화형이라면 수용소 내 가장 심한 처벌에 해당합니다. 1년인가 2년의 형을 받아 갔는데, 갑자기 살이 빠지고 영양실조에 걸린 거죠. 어느 날 그 사람을 공개처형을 한다고 내걸었더라고요.

교화형 2년인가 형을 받은 사람인데 왜 벌써 공개처형을 하지 싶었어요. 현장에 나가서 그 사람을 보니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같은 직장에 나가며 보던 사람이기 때문에 알고 있던 사람이었거든요. 부모, 형제 나오라는데 가족도 없고. 그래서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보고 나오라해서 제일 먼저 돌을 던지게 하고, 그 다음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돌을 던지게 했죠.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 이 사람을 동정한다 하여 감정 실지 않고 돌을 던지면 너희도 같이 총살하겠다며 엄포를 놓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주 심하게 돌을 던졌죠.

한번 맞을 때마다 살이 터져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살점이 다 떨어져 나와 뼈가 보일 정도가 됐어요. 결국 그 사람은 총도 맞을 필요 없이 죽었어요. 

– 박주용씨가 18호 관리소를 탈출한 게 2011년이네요, 벌써 5~6년이 지났습니다. 그때까지도 공개처형이 이뤄졌나요? 지금도 계속 이뤄지고 있을까요?

네, 그때까지도 계속 있었죠. 지금은 아마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저는 북한과 연결을 못하고 있지만, 주변에 탈북 친구들이 있어요. 북한과 연결을 하고 있는 그 친구들을 통해 제가 아는 친구의 언니가 공개총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예전에 김정일 시대에는 공개총살 당하지 않았을 죄목인데 (공개총살을 했다며) 김정은 정권 들어 공포정신을 많이 심어준다고 하더라고요. 말 한 마디 잘못한 죄로 총살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 그런 점에 비춰볼 때 수용소 내 공개처형도 과거보다 더 심해졌을 거라고 보시는 거군요.

진행 : 지금까지 박주용씨를 통해 18호 관리소 내 공개처형 실태에 관해 들어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탈북민의 증언과 국제사회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에서 공개적 사형집행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온 것으로 파악됩니다. 공개적 사형집행은 사회나 관리소 내에서 죄목에 차이가 조금 있을 뿐 형태는 매우 유사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18호 관리소 내에서 공개처형 실태를 박주용씨의 증언을 통해서 들어봤습니다. 이에 대한 전문가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 준비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정현 교수 전화 연결 돼 있습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 북한에서 공개처형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어떤 인권침해 문제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일단 이런 식으로 정식 사법절차 없이 공개처형을 실시하는 것 자체는 자유권규약 제6조 생명권의 자의적 침해로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한 국가의 정식 사법절차에 의해 중한 범죄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는 경우라면 생명권 침해라고까지 보지는 않습니다만, 내용적으로 봐도 관리소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 일반 민주국가에서 사형감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근본적으로는 반인권적인 정치범수용소에 초법적으로 구금∙수용하는 그 자체가 그 후 관리소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의 근간이 된다고 보여 집니다. “공개”적인 방식으로 처형하는 “방식”과 관련해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인격을 말살하고 공개적으로 또 부모를 제일 앞에서 보게 하는 등의 행위는 생명권 침해와 별도로 자유권규약 제7조에서 금지한 고문 및 기타 비인도적 처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어린이들에게까지 이런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북한도 당사국인 아동권리보호협약에서 규정한 아동 최선의 이익 우선 원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렇게 국제 조약 등에서 규정한 내용을 위반할 경우, 그 위반 사항이 명백할 경우 국제사회에서는 그 해당 가해자에게 어떤 처벌을 할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국제 인권 레짐에서는 북한의 이런 상황에 대해 계속 개선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이러한 것이 반인도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국제 형사법적인 (처벌)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국제 시스템 하에서는 북한이 (인권 개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강제적으로 이행을 확보하는 방안은 아직까지 부족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외부에서 (북한 당국이) 정확하게 어떤 인권 침해를 했는지 꾸준하게 지적하는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네, 조정현 교수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행 : 북한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은 인권침해를 기록해  향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근거자료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북한 당국과 책임자들은 인권 침해 행위를 지금이라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라지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눈물의 기록, 정의의 기록>, 지금까지 이광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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