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전투기 조종사들도 탈북을 꿈꾸고 있을까?

북한 전투기의 중국 랴오닝성 푸순 추락 사건을 두고 ‘조종사가 정말로 탈북을 시도했을까’라는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조종사가 사망했으니 진실의 열쇠는 북한 군부가 쥐고 있는 셈이다. 북한 군부가 이런 사안을 공식 확인해줄리 없으니, 조종사의 속내는 당분간 ‘미스테리’로 남게 됐다. 그러나 최근 북한 사회의 체제 이완 속도를 고려해보면 전투기 조종사까지 탈북을 시도할 수 있다는 개연성이 그리 놀랍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북한에서 ‘비행사’라는 직종은 잠수함 승조원, 미사일 부대 근무자들과 같이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이들은 사회에서 사람을 죽이고 자기부대에 복귀하면 경무대(헌병)들도 체포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갖고 있다.

군 징집을 기다리는 중학교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병종은 ‘중앙당 5’과 다음으로 비행사다. 선발기준의 첫째는 ‘출신성분’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노동자 자식들 중에서도 본인이 학업 성적과 체력이 우수하면 비행사로 선발될 수 있었다. 물론 가족이나 친인척들 중에 정치적 과오가 있는 사람은 제외였다. 가족 중에 한국전쟁시기 한국 편을 들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있으면 역시 제외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비행사는 ‘위험 직업’으로 인식되어 간부층 자식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90년대에 경제난이 시작되자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는 비행사 병종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권력기관 간부들의 자식들이 대거 비행사의 길을 선택했다.

북한의 비행사 집단이 크게 한번 홍역을 치룬 일이 있었으니 바로 1983년 미그기를 이끌고 한국에 귀순한 이웅평 사건이다. 당시 이웅평의 귀순사건을 두고 북한 비행사들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소문이 돌았다.

이웅평의 집안은 대지주였으나 6.25 전쟁 시절 이웅평의 조부가 마을의 한 가족을 어린애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사살하고 자기 아들을 그 집안 자식으로 둔갑시켜 피살자 신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6.25전쟁 시기 국군이나 미군, 남한 치안대에 희생을 당한 사람을 ‘피살자’로 부르며 ‘전사자’ 다음으로 예우를 했다. 덕분에 이웅평의 아버지는 김일성 군사대학 학부장으로까지 승진했고 이웅평이 또한 이 배경으로 비행사가 됐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웅평 집안의 신분이 드러나면서 벌어졌다. 보위사령부 담당지도원이 현지로 신원확인을 나갔다가 한 주민으로부터 그 집안은 어린애 하나 남지 않고 몰살당했다는 제보를 받은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보위지도원은 끈질기게 조사해 끝내 이들 집안의 내력을 알아냈으며 이는 이웅평이 근무하던 부대 정치부와 보위부에도 통보됐다.

우연히 이에 대해 알게 된 이웅평은 자신의 앞길이 끝장났음을 절감하고 결국 남으로 탈출했다는 것이 북한에서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해 북한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비행사들에 대한 신원조회를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상당수의 비행사들이 옷을 벗게 됐다.

이들을 교육시킨 비용이 아까웠는지 북한은 비행사 지위만 박탈하고 비행기수리 공장과 같은 관련 부문들에 집단 배치했다.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에 위치한 881호 군수공장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현재 북한에서 비행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특급 대우’를 해준다고 전해지지만 내용적으로는 일반 중산층 생활수준에 불과하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당간부들, 권력을 쥐고 편하게 자리를 유지하는 법기관 간부들과 비교해보면 비행사들이 느끼는 ‘박탈감’이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북한 간부층이 외화벌이와 시장 장사를 통해 부와 권력을 키워가는 동안 비행사들은 여전히 ‘국가공급’에 얽매여 살고 있다. 주요 간부들은 돼지머리 같은 것은 음식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분위기인데 비해 비행사들은 가족들을 위해 국가에서 나오는 공급물자들을 시장에 내다팔며 살아가고 있다.

90년대 초반까지 비행사들에게 차려지는 ‘4호 공급물자’는 100% 무료였다. 가족들에게는 무료공급과 함께 필요에 따라 유료공급이 지급되었다. 또 조종사들이 가정에 대한 걱정으로 훈련 시 사고를 일으킬 것을 우려해 자녀문제를 비롯한 가정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해 주었으며 가족들을 위한 ‘배려’ 명목으로 월 1회씩 정상적인 상품 공급이 이뤄졌다.

90년대 말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비행사 가족들에게는 정상적인 식량배급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와 환경이 달라지니 이들의 스트레스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비행사의 자녀들은 학교에서도 ‘타겟’이 된다. 학교 교원들은 상급에서 지시되는 각종 사업을 진행할 때 마다 비행사 자녀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교원들은 비행사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공급을 잘해주어 다른 아이들보다 잘 살고 있으니 학교 사업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자녀를 학교에 맡긴 부모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내야 한다.

공군 부대들은 비교적 석탄 공급이 잘되지만 절대량이 부족해 자체적으로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담배 한두갑이나 콩기름, 맥주 등을 쥐어주면 주변 농장 농장원들이나 산림감시원들이 땔감을 마련해 줬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 그정도 성의로 땔감을 부탁하면 ‘비웃음’만 돌아온다. 

비행사 아내들 역시 ‘생활전선’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아내들은 공급받은 물자를 도매 장사꾼들에게 넘겨주거나 부대 인근 농촌들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팔기도 한다. 비행사 가족들은 식량은 물론, 담배 콩 설탕가루 기름 심지어 맥주까지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비행사 가족들을 위한 공급품은 부대 내 군인상점들을 통해 공급되는데 물자가 상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연대장과 보위부장, 정치부장 등이 챙겨간다. 

상점 책임자는 비행사 가족에게 공급해야 할 물자들을 자기 개인 인맥관리용으로 먼저 이용하면서 유세를 떤다. 부대 후방창고(물자창고) 역시  유사시 전투를 감당해야 할 비행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간부들를 위한 창고로 변질됐다.

국가로부터 쌀 한톨도 못받는 노동자들이 수두룩 한 상황에서도 비행사들에게 차려지는 공급은 ‘특급’ 수준이다. 그러나 다른 간부들 처럼 장사와 뇌물 수수를 위해 활용할 ‘권력’이 없으니, 실제 생활수준도 시장에서 가전제품 장사를 하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

비행사 집단 안에서도 집안 배경에 따라 그 생활수준이 천차 만별이다. 부모가 권력이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 간부행세를 하며 잘 살 수 있지만, 부모가 별 권력이 없는 자리에 있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 국가공급에 의존해서만 살아야 한다.

북한의 비행사들이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뭐니뭐니 해도 ‘노후걱정’ 이다. 지금 북한 사회는 현직에 있을 때와 은퇴 이후의 처우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90년대까지 비행사들을 ‘나라의 보배’라고 칭송하며 은퇴후 노후까지 책임질 것처럼 떠들었지만, 2000년대 이후 분야를 막론하고 ‘은퇴자’들은 철저히 버림 당했다. 현행 법에서 주어지는 국가연금은 옥수수 1kg 가격도 안된다.

통상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년층 보다 청년층들이 국가에 대한 불만이 많은데 비해 북한에서는 유독 노년층들이 국가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현직에서 물러나면 결국 소토지 농사를 해야하거나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하는데, 은퇴자들은 시장 경험도 부족하고 노동력도 딸린다. 은퇴한 선배 노병의 이런 현실을 보는 현직 비행사들의 마음이 편할리 없다.

북한에서 최고 대우를 받던 비행사가 미그기를 몰고 탈북을 시도한다는 것, 이제는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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