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위조달러, 한반도 정세 확 바꾼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를 몰고 온 요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김정일의 중국 방문, 나머지 하나는 북한의 위조달러 등 불법행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미-중-남-북간의 변화가 더욱 선명해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김정일의 방중은 북중관계 복원의 의미가 크다. 북중관계 변화가 어느날 갑자기 진행된 것은 아니다.

덩샤오핑 시기부터 양국관계는 멀어졌다. 김정일은 개혁개방의 중국을 ‘수정주의’로 비난하면서 거리를 두었다. 중국은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오도록 계속 권유했고 끊임없이 지원도 했지만, 김정일은 주민들이 굶어죽든 말든 말을 듣지 않았다. 김정일은 오히려 대국들 간의 전통적인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중-러 사이를 오가며 정권유지에 필요한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다.

북한이 중국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계기는 역시 동유럽 붕괴와 90년대 중반에 발생한 대아사 사건에서 찾는 게 옳다. 만약 배후에 중국이 없었더라면 당시 북한은 동유럽 국가와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2000년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서서히 복원하면서 2006년 1월 18일까지 네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이번 김정일의 방중을 두고 북중관계가 김일성 시기로 완전히 되돌아갔다는 평가까지 있다.

더욱 높아진 북한의 중국의존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른 면이 있다. 지금의 북중관계는 김일성 시기의 ‘동지적 관계’라기보다 북한의 중국 의존화가 심화되었다고 보아야 정확할 것 같다. 대내외적으로 불리해진 김정일이 그동안 중국에 기대어 왔고, 중국은 그러한 김정일을 잡아당겨 확실히 친중화 시켜놓은 것이다. 이번 김정일의 방중은 김일성 사망 후 10여년간 북중관계 변화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경제분야에서 서서히 북한의 중국 의존도를 높여왔다. 곡물, 에너지, 생활 소비재는 물론 광산 등 1차산업 개발, 기업진출, 나진항 50년 조차(租借) 등 인프라까지 경제분야의 대북 의존도를 지속적으로 높여 왔다. 지금 북한에는 위안화, 엔화, 달러, 유로가 유통되고 있지만, 주민 실생활에서는 북한 원화와 위안화 사용이 압도적이다. 주민들의 소비생활에서 중국은 ‘외국’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북한이 외교적으로 중국에 의존하게 된 계기는 역시 6자 회담이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중국을 대미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 물론 중국도 북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원하고 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바로 이웃한 나라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부터가 위험할 뿐이다.

중국, 외교의 르네상스 시기

또 한편으로는 6자 회담이라는 국제 테이블을 통해 북-중은 서로 주고받는 것도 있다. 김정일은 테이블의 주석(主席)으로 중국을 밀어주면서 북핵을 계기로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아가라는 것이다. 실제 6자회담이 거듭되는 동안 어느새 베이징은 동북아 외교의 주무대가 되었고, 북-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회담도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다. 중국이 한반도의 운명문제를 놓고 미국과 대좌한 경우는 정전협정 이후 처음이자, 미국 일본 러시아와 맞상대하면서 국제회담의 주인이 된 것도 처음이다. 중국은 동북아 외교의 르네상스기에 진입해 있다.

김정일은 동북아에서 중국의 지위와 역할을 높여주고 외교적으로는 방어막으로, 경제적으로는 지원대상으로 삼아왔다. 지금 양국은 기묘한 애증관계에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볼 때 김정일은 중국의 지원을 뜯어내는 일종의 ‘꽃뱀’이지만, 동북아에서 한반도의 지리정치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김정일의 ‘꽃뱀’ 노릇은 중국의 근본이해관계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다. 남한은 멋도 모르고 한미공조 대신 김정일을 따라가면서 한반도 전체가 중국으로 쏠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례적인 후진타오의 ‘정치 훈수’

이같은 국면에서 등장한 북한의 위조달러와 돈세탁 등 국제범죄 행위에 대한 미국의 법적 대응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변화를 빠른 속도로 바꿔놓고 있다.

이번 김정일의 방중에서 북중관계 복원이라는 포괄적 목적 외에 핵심 현안은 미국의 금융조치와 6자회담에 대한 북중 간 협의였던 것은 분명하다.

후진타오-김정일 회담에서 김정일은 “6자회담 과정에서 조성된 난관을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극복하는 데 노력하기로 했다”고 언급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의 중국방문을 이례적으로 빨리 보도했다. 김정일이 언급한 ‘난관’은 미국의 금융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김정일의 이 발언에 후주석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후진타오는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중국 당과 정부, 인민은 진심으로 조선의 정치안정과 경제번영 및 인민의 행복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신화사통신이 보도했다. 이 언급은 조선중앙통신 보도에는 빠져있다.

여기에서 후주석의 ‘정치 안정’이란 언급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이 표현은 ‘북한 내부의 정치안정’으로는 해석이 안된다. 그것은 “김정일 너, 국내정치 똑바로 해라”며 내정간섭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주석의 언급은 “핵과 위조달러 문제 등을 잘 해결해서 국제정치적 불안정을 안정되게 하고, 빨리 개혁개방해서 경제번영을 이루어 인민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의미로 ‘통역’된다. 후주석의 이례적인 ‘정치 훈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대목에서 북한의 범죄행위에 대해 미국이 어느 정도로 중국을 강하게 압박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시종일관 위조달러 문제를 외교적 관점이 아닌 법적 관점에서 다뤄왔고, 94년 마카오 주정부의 위조달러 유통금지 조치 이후 최근 방코델타아시아은행 거래금지까지 중국의 조치를 보면, 중국도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기 힘든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있는 것 같다.

노정부, 9.11 때와 유사한 인식

부시 미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신년기자회견에서 “위폐문제에 타협 없다”며 재차 쐐기를 박았다. 아울러 북한과 거래하는 금융기관은 미국내에서 활동(business)할 수 없도록 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행정명령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철저히 법적문제이며 타협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남한정부가 미국이 위조달러 문제를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제대로 못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위조달러 제조 및 유통은 미국 입장에서는 ‘금융테러’를 해온 것이다. 지금 남한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마치 DJ정부가 2001년 9.11 테러 직후에 미국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몰랐던 것과 유사할뿐더러, 한발짝 더 나아가 ‘금융테러국’과 손잡고 미국에 공동대응할 태세처럼 보이고 있다.

현재 북한의 위조달러에 대한 6자 회담 관련국의 인식을 보면, 미국과 일본은 외교문제 아닌 법적문제로, 북한은 ‘6자회담 과정에서 조성된 난관’ 즉 외교문제로, 중국은 이에 대한 무응답과 후진타오의 ‘정치안정’ 발언에서 미루어 외교문제에서 법적문제로 인식의 이동중, 남한은 확실한 입장정리도 없고 막연하게 ‘외교문제’로 인식하는 듯하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인정한 북한의 위조달러에 대해 ‘증거를 더 내놔라’고 한다.

라파엘 펄 미 의회조사국 연구원은 26일 “우리(미국)가 증거를 보여준 사람들은 동의해도, 그 위쪽으로 가면 이 증거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며 “문제는 한미 정부가 이 문제에 서로 다른 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9.11 테러후 미국의 최우선 순위(vital issue)가 대(對)테러로 전환된 줄도 모르고 ‘테러사태로 남북관계가 지장받지 않아야 할텐데…’라며 우물안 개구리 같은 모습을 보인 DJ정부와 ‘관변 전문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노정부도 북한의 대미 ‘금융테러’를 ‘테러‘로 보지 않고 있지만 상황은 당시와 아주 유사하다.

물론 9.11 테러는 민간인 3천여 명이 즉사했고, 전세계 사람들이 참혹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충격이 훨씬 컸다. 반면 위조달러로 인해 죽은 사람이 없고 어느 정도로 피해상황이 있었는지 눈에 보이진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심각함이 정확하게 덜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자국 화폐를 보호해야 하고 국제금융질서를 지켜야 하는 미국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자국 금융질서에 대한 테러행위인 것이다. 미국은 위폐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때까지 적당히 넘어가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정부가 위폐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상관없이 ‘법대로’ 진행될 것이다.

군사테러와 금융테러, 종착지는 비슷

이렇게 볼 때 북한의 위조달러 문제는 한반도 정세를 또 한번 크게 바꿔놓을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위조달러 문제로 한미간 마찰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미관계는 9.11 테러를 계기로 닥친 심각한 위기를 또 한번 맞을 게 틀림없다.

중요한 사실은 9.11 테러와 북한의 위조달러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9.11 테러는 중동의 테러조직이 감행했다. 또 어찌됐든 이라크 파병으로 한미관계는 겉으로나마 봉합되었다. 반면 위조달러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는 중동의 테러조직이 아니라 바로 ‘김정일 정권’이다. 9.11 사태는 본질상 테러조직의 군사행위였다. 미국도 이를 군사적으로 해결해 왔다. 위조달러는 본질상 ‘금융테러’다. 따라서 법에 의거한 금융조치로 해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해결의 수단만 다를 뿐 종착지는 비슷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곧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됐다. 불법 위조달러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법적으로 해결하는 데 동참할 것인지, ‘증거를 더 내놔라’며 김정일 정권과 손잡고 미국에 공동대응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더욱 중대한 문제가 있다. 9.11 테러는 우리와 직접 상관이 없는 중동발(發)이었지만, 위조달러는 바로 ‘평양발’이다. 9.11테러는 우리가 제3자 비슷한 입장에서 파병을 통해 적당히 한미관계를 봉합했지만, 평양발 금융테러를 봉합하기 위해 우리가 ‘파병’할 곳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김정일 정권의 범죄행위에 같이 엮여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런데 노정권은 차기정권 재창출을 위해 남북관계에 ‘풀 베팅’을 걸고 있다. 정확하게는 김정일 범죄정권과의 공조에 명운을 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위조달러 문제가 계속될수록 우리는 한미공조냐, 김정일 정권과의 공존이냐를 두고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게 됐다.

이것이 올해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손광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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