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우상화에 10대 동원…혹한에 ‘천리행군’

천리, 무려 400km를 걸어야 하는 천리 행군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훈련으로 일컬어진다. 군에서도 특전사나 해병대 등 일부 부대에서만 행해지는 강도 높은 훈련이다. 그런데, 이 천리 행군이 지금 북한에서 그것도 소년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 평양에서 시작

지난달 22일 평양의 만경대혁명학원에서는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이 시작됐다. ‘광복의 천리길’은 김일성이 13살 때인 1925년에 아버지인 김형직이 만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 독립의지’를 품으며, 고향인 평양 만경대에서 만주까지 걸었다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평양을 출발해 양강도 포평까지 걸어가는 답사행군길을 일컫는다. 포평에는 김일성이 당시 압록강을 건넜다는 나루터 등 각종 혁명사적지가 있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걸었다는 고행의 길을 걸으며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을 다지게 하는 우상화 작업이다.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대의 출발모임. 상당수 아이들이 어려 보인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광복의 천리길’ 90주년을 맞아 조직된 이번 답사행군에는 북한 전역에서 수 백명의 소년들이 참가했다. 조선중앙TV가 방송한 출발모임 화면을 보면, 우리의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소년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13살이라고 소개한 소년도 있는데, 이보다 어려 보이는 소년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10살 남짓한 아이들까지 ‘천리 행군’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특전사나 해병대처럼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길에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어린 아이들이 ‘천리 행군’을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일까?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 날, 수많은 인파가 평양 거리에 나와 이들의 출발을 환영했다. 대대적인 환영인파와 조선중앙TV의 열띤 취재에 힘입어 소년들도 한껏 들뜬 표정이다. “대열에 서서 걸으니 온 나라 학생 소년들이 모두 부러워서 나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는 소년의 인터뷰가 그저 가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 날, 수많은 인파가 평양 거리에서 이들의 출발을 환송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답사행군대가 높은 산을 넘어가는 모습. /사진=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천리 행군’은 그야말로 ‘천리 행군’이다. 주변의 환송에 들뜬 마음은 잠시, 길고 긴 400km의 길을 1, 2월의 추위 속에 열흘 넘게 걸어야 한다. 북한에서 15살 때 백두산 답사행군을 해봤다는 한 탈북자는 “발에 물집이 잡히면 쉬는 시간에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잡아줘야 하는 고달픈 여정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혁명 전통을 따라가는 ‘성스러운 여정’이기 때문에 “낙오자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여정이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영광’스런 일정이라고 한다. 이런 답사행군대에 뽑힌다는 것 자체가 북한의 ‘충성분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추위가 온 몸에 파고드는 일정이지만, 그러한 행군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내의 자랑으로 된다는 것이다.

연초마다 백두산 답사행군대 조직

‘광복의 천리길’은 아니더라도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앞두고 백두산에서는 여러 조직들의 답사행군이 행해진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을 했고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추위 속 고생길이지만,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러한 작업들이 아직은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데 나름의 효과가 있는 듯 하다.



▲답사행군대원들이 백두산 밀영을 둘러보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은 사실 북한이 만들어낸 허구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 부대는 194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토벌작전에 밀려 소련으로 퇴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정일이 태어나던 1942년 2월 16일 김일성 부대는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학자들은 김정일이 소련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어느 곳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 투쟁과 우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그럴싸하게 조합시켰다. ‘겨울 눈이 가득 쌓인 백두산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이어가며 혁명의 2세인 김정일까지 낳은 김일성’, 이것이 바로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주민들에게 선전하는 주요한 신화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광복의 천리길’과 같은 행사들이 끊임없이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0대 소년들이 걸어야 하는 ‘광복의 천리길’은 북한 체제 유지를 위한 ‘고행의 답사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