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예술지, 한국최초 테너 안기영 상세 소개

“민족음악 발전을 위하여 한 생을 성실하게 일해 온 안기영은 오늘도 우리 인민의 추억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북한의 월간 예술지인 ‘조선예술’ 최근호(2008년3월호)는 한국 최초의 테너 가수이자 작곡가인 안기영(安基永.1900~1980)씨의 음악가로서의 행적을 상세히 전하면서 그의 ‘민족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6일 입수된 ‘조선예술’에 따르면, 안씨는 충남 정산군(현 공주시)에서 태어나 남달리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몸부림” 치면서 중국 동북지방과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등을 떠돌아 다니면서 음악 공부를 해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25년 미국에서 3년간 고학하면서 작곡과 성악을 공부했다.

1928년 귀국 후 이화전문(현 이화여대) 음악과 성악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4년간 테너가수로 활동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때는 서울역에서 ‘만세’를 불렀다가 일본 헌병대에서 문초받고 퇴학당했으며, 한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9개국어로 각국 민요와 가극의 주제가를 불렀으나 “반일 감정의 표시로 일본 노래만은 부르지 않았다”고 ‘조선예술’은 강조했다.

안씨는 1920년대 말부터 “퇴폐적인 유행가의 범람에 대항해 진보적인 가요 창작을 지향”해 ‘그리운 강남’, ‘조선의 꽃’, ‘우리 아기날’, ‘살구꽃’, ‘산고개’, ‘해당화’, ‘추억’, ‘작별’ 등을 작곡했다고 조선예술은 설명했다.

이어 1941년에는 처음으로 가극 ‘콩쥐팥쥐’를 작곡한 뒤 ‘견우직녀’, ‘은하수’, ‘에밀레종’ 등 가극 작품을 잇따라 창작했다.

1937년 초연된 ‘견우직녀’는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로 알려진 현제명의 ‘춘향전'(1950년)보다 13년 앞선다.

‘조선예술’은 그가 당시 “심해지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책동에 대처하여 뜻이 있는 음악가, 문학가, 연극인들과 함께 향토극이라는 새로운 민족적인 가극을 창작하는 데 힘을 넣었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월북해 이듬해 7월부터 평양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와 관련, 남한에서는 1947년 5월 창당된 근로인민당의 음악부장으로 활동하던 안씨가 당수인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 추도곡’을 작곡하고 장례식때 지휘를 맡았다가 음악 활동이 금지되자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악에서의 변성에 대하여’, ‘조선민요의 음계적 고찰’ 등 여러 편의 논문을 집필했으며 ‘아름다운 거리’, ‘해바라기’, ‘우리 아버지’ 등 20여 편의 동요와 합창곡도 창작했다.

‘조선예술’은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북한 노동)당에서는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고 부교수로 내세워주었다”고 덧붙였다.

남한에서 안기영씨 작품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분류됐다가 1988년 해금됐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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