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여물기 전 음력 4~5월을 옛날에 보릿고개라고 했다. 묵은 곡식이 떨어질 시기다. 우리에겐 옛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북한은 지금 현실로 다가섰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했다거나 하반기 이후 대규모 아사자 발생 가능성을 주장하는 보도를 접하고 먼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북한농업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필자는 북한의 식량사정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식량사정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언론보도나 대북지원 NGO의 주장처럼 대규모 아사자 발생 가능성에는 동의할 수 없다.
북한의 연간 곡물수요량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성인 1일 2,130Kcal(연간 222Kg)를 주식에서 섭취하는 권고 기준에 따르면 650만톤 규모다. 북한은 만성적 식량부족 국가로서 세계식량계획(WFP)에서 긴급지원 대상국으로 분류되며, 이 경우 1일 필요 칼로리를 25% 감축(연간 167Kg)하여 수요량을 산출하는 기준을 적용하게 되므로 사실상 연간 곡물 수요량은 540만톤(식용:381만톤, 비식용 159만톤)이 필요하다.
실제로 북한은 1973년부터 ‘전쟁 비축미’ ‘애국미’라는 명분으로 배급량을 두차례에 걸쳐 22%를 감량하여, 성인 1일 배급량 700g을 546g으로 줄여 공급해 오고 있어 수요량 계산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북한의 곡물생산량은 단위 면적당 남한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여 자급자족이 어려운데다, 지난해는 홍수 피해로 예년보다 11%나 감소하여 총 401만톤이 생산되었다. 북한은 그동안 중국으로부터 20만톤을 수입했고, 최근 미국이 지원하기로 한 50만톤을 합치면 5월 현재 471만톤이 확보된 셈이다.
5월 12일 북한당국도 WFP에 식량지원을 요청하면서 전년도 생산량을 403만톤, 부족량을 120만톤으로 신고한 바 있어 위의 전망치에 객관성이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또 앞으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물량 등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추세라면 연간 수요량의 93% 이상 확보가 가능하다. 따라서 잘만하면 올해 추곡이 나올 때까지 자체 식량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민들이 굶주림에 처해 위급한 상황이라면 당장 전쟁비축미도 풀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북한당국이 식량사정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그렇게 다급하지 않기 때문에, 최근 한국정부의 옥수수 5만톤 지원 제의나 민간단체의 식량지원마저 거부하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일부 지역에서의 아사발생의 원인은 어디에 놓여 있으며, 근본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식량의 절대량 부족보다는 분배체계의 불균형에 있다. 사회부패지수가 후진국과 사회주의 국가에서 높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북한체제는 오히려 정도가 심하다. 광범위한 부패고리가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을 착복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특히 체제유지를 위해 당 군 정 특권계층, 평양 등 대도시 위주로 배급이 우선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식량난이 심해지면 도시 실직자나 노약자, 아동 및 내륙 오지 주민 등 소위 취약계층은 직접 타격을 받게 된다. 세계식량계획(WFP)은 이러한 취약계층 규모를 650만명으로 추산하며, 이들중 아사자 발생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또 식량난을 심화시키는 요인은 물가관리의 실패다. 90년대 중반 식량난 파동을 경험한 주민으로선 식량사정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수해가 난 이후부터 식량사정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감이 확산되고 국제곡물가 상승 여파가 장마당 곡물가로 이어져, 특권층의 사재기 등이 횡행하면서 올해 4월부터 쌀 가격이 연말대비 2~3배로 상승했다. 이 때문에 그나마 부족한 식량을 장마당에서 구입할 수 있는 주민들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다 북한당국이 자본주의에 물든다며 장마당을 열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나선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근로자 월 급여가 북한돈 3,000~6,000원에 불과한데 쌀1Kg 가격이 2500원에서 지속 상승한다면 서민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재국가의 이러한 불합리한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세계식량계획(WFP)은 분배 투명성 문제에 역점을 두고 식량을 지원해 왔고, 미국도 이번에 모니터링 강화조건으로 50만톤 지원에 합의한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저수지에 저수량이 아무리 풍부해도 배수로가 막혀 있거나 자기 논의 물꼬만 열어 놓게 된다면 농사철 용수공급에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는 것처럼, 북한체제에서 공평한 분배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현실에선 항상 힘없는 주민이 배를 곯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미 20년 이상 지속된 북한의 식량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겐 책임이 없을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지난 2000년-2007년간 쌀 260만톤, 비료 240만톤을 지원했으며 금액만으로도 총 4조119억원(양특회계 2조 3,584억원 포함)에 이른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쌀 40만톤과 비료 30만톤씩을 제공해온 셈이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비료를 지원하면서도 영농제도와 방법 개선 등 적극적인 조건을 달 수 없었을까? 고기를 주는 것보다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쌍방에 도움이 되고 상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진정성이 담겨져 있을 텐데 말이다.
지나온 과정을 보면 과거 정부의 무작정 도움은 북한의 자구노력을 더욱 게을리하도록 만들어 도리어 문제를 키워 온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따라서 이러한 지원방식을 계속 반복해야 되겠는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언론과 국민들은 북한에 한 두번 다녀와서 편중된 정보나 민족적 감성만 앞세워 있지도 않을 대규모 아사설을 운운하며 여론을 확대 재생산하는 지금의 형국은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식이 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북한과 같이 불합리한 사회에 우리가 원칙없이 식량을 지원할 경우, 결국 누구를 위한 지원이 되는 것일까? 물론 배수로가 막히면 물이 넘쳐 평소 물길이 닿지 않던 곳까지도 물길이 뻗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진 않다. 하지만 대북지원의 원칙을 세웠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게다가 북한당국은 국민들의 선거로 뽑힌 남한 대통령을 ‘역도’니, ‘패도’니 폄하하고, 대남 선동매체를 통해 정권타도를 외치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남한의 ‘진보세력’들도 쇠고기 파동의 여세를 몰아 정부를 공격하고 있어 자칫 대북정책의 원칙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북한은 이제라도 국제규범을 갖춰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고 대화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당국이 아직도 ‘선군정치의 우산 밑에서 남한이 평화를 누리는 대가’로 쌀지원을 바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면, 우리로선 이제 바로 잡아야 할 기회라고 본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다수 국민의 입장에 서서 의연하게 원칙을 지키며 멀리보고 대북정책을 밀고나갈 것을 주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