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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미국 등에서 제기되는 북한 붕괴론은 오판”이라며 “어려울수록 단결하는 것이 북한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11일 ‘공화국은 우리 인민의 자주적 삶과 행복의 요람’이라는 논설을 통해 김정일의 이같은 말을 전하면서 “김위원장은 ‘미국이 아직도 상대(북한 지칭)가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은 미국에서 북한 붕괴론이 “번지던 때” 김 위원장이 한 말이라면서 김 위원장은 “미국은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며 “우리가 저들의 군사적 압력과 공갈, 경제 봉쇄로 얼마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 것만 보아도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얼마나 오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이어 김정일이 “시련과 난관이 겹쌓일수록 백배, 천배로 강해지는 것이 바로 우리 인민”이라며 “지금 우리 인민들은 비록 남들처럼 잘 먹지도 못하고 난방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집에서 겨울을 나고 있지만 당의 두리(주변)에 튼튼히 뭉쳐 승리를 낙관하며 힘차게 싸워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상 노동신문의 주장을 요약하면,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한국과 미국에서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던 시기에 김정일위원장이 이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듯이, 지금 북한사회는 결코 붕괴되지 않으며 당과 인민은 잘 뭉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설은 엉뚱하면서도 아주 재미 있는(?) 구석이 있다.
결론부터 말해 ‘누가 북한 정권이 무너질 거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스스로 우리는 안 무너진다고 강력히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지난해 6자회담 2.13 합의 이후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정권을 공격하거나, 공식적으로 북한붕괴 우려를 언급한 국가는 없다. 미국 행정부 주변에서도 2.13 이후에는 북한 ‘레짐 체인지론’이 쑥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시쳇말로 아무도 지금 당신보고 방귀를 뀌었다고 시비 거는 사람이 없는데, 왜 느닷없이 ‘나는 결코 방귀를 뀌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서느냐 말이다.
2.13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 붕괴론이나 북한 급변사태 대비를 언급한 곳이 있었다면 데일리NK와 계간 ‘시대정신’을 비롯한 한국내 일부 전문가들 그리고 미국, 일본에서 북한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전문가들이 있을 뿐이다. 북한 붕괴론이 있었다 해도 그야말로 민간 차원에서만 조금 거론됐던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위대한 조선노동당’의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한줌도 안되는 남조선 친미보수 매체”와 “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들”인 일부 해외 한반도전문가들의 주장을 직접 반박하기 위해 그 아까운 지면(紙面)을 할애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21세기의 태양이시고 백전백승의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님”이 북한 붕괴론이 “번지던 때”(94~98년 지칭)에 말했다고 시기까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하면서 거론하느냐는 것이다.
94년부터 지금까지 노동신문에서 식량난 시기(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언급하면서 ‘우리사회가 붕괴 위험에 있(었)다’는 식의 논평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 우리 사회의 붕괴를 언급하고 있다’는 내용, 또는 그러한 붕괴 우려를 부인하는 내용, 또는 북한 붕괴를 추지(推知)할 수 있는 표현은 나온 적이 없다. 노동신문을 계속 보는 사람들이라면 북한당국이 스스로 ‘붕괴 위험’을 언급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와 유사한 표현이 등장한다면 주로 ‘우리 사회를 공격하고 전복하려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망하도록 획책하려는…’ 식이다.
그런데 왜 노동신문은 김정일의 ‘언급’임을 인용하면서까지 ‘북 붕괴론은 오판’이라고 주장했을까?
많은 엘리트 탈북자들과 북한주민들, 북한을 오래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노동신문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 당의 배급제에 이상 없다’는 기사가 나올 경우, “배급제에 이상이 생겼으니까 ‘이상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기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상의 진지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기사가 등장하면 ‘지금 북한사회에 사상의 문제가 심각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소련 체제의 두 가지 중요매체는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였다. 프라우다는 당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의회가 발행하는 기관지다. 프라우다는 러시아 말로 ‘사실’이라는 뜻, 이즈베스티야는 ‘뉴스’다. 구소련 사회를 비꼬는 유명한 농담이 “프라우다에는 ‘사실’이 없고, 이즈베스티야에는 ‘뉴스’가 없다”는 유행어였다. 북한 사회는 이보다 훨씬 더하다.
노동신문 5,6면은 국제소식과 남한 비난 기사를 싣는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에게 노동신문 중 가장 인기 있는 면이 5,6면이다. 북한 대학생들은 이미 80년대부터 ‘노동신문 5, 6면을 읽는 방법’을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이를 테면 남한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사진이 실리면 ‘남한 대학생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남조선은 어떻게 해서 자유롭게 데모를 할 수 있는가’가 더 관심이었다.
따라서 이번 노동신문에 실린 ‘우리가 붕괴될 것으로 믿는다면 오판’이라는 논설은 ‘우리는 붕괴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실제로 내부 체제가 불안정하지 않다면 굳이 ‘우리는 붕괴되지 않는다’고 강력히 주장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번 노동신문 논설은 김정일의 언급까지 끌어내며 ‘북한 당국의 결심을 미국에 알리는 강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심각한 내부 모순과 체제 붕괴의 위기감과 공포감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경우로 볼 수 있다.